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자 Mar 17.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열입곱 염희 : 우리는 늘 시간을 먹어 치우는 거라지.    

 



  잠든 정애의 머리를 만졌다. 이불 속에 콕 박혀서 머리카락만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잠을 자는 데도 자그마했고, 고요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두었던 노트를 끌어당겼다. 굴러다니던 펜을 집어 노트에 끄적였다. 언젠가 이것이 편지가 되면, 정애에게 닿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애, 넌 마치 없는 것 같아. 교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어. 사람이 어려워서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세상이 어려운 거라고 생각해. 어딘가에 끼지 못하고 헤매듯 흘러다니는 넌 찌질해보였어. 사실 그랬다. 그리고 생각했어. 넌 참 보잘것없이 생활하는구나. 보잘 것 없구나. 근데 어쩌면 그 보잘것없음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는지 몰라. 무심한 듯 호기심을 띈 네 질문들, 심드렁하지만 계속 응시하는 눈빛, 그런 것이 내게 와 부딪혔어. 눈치를 많이 보는 이유를 시끄러운 게 싫어서라고 했지만, 넌 사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좋아하게 되는 게 무서운 거야. 넌 걱정을 많이 하는 아이고, 무언가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할 수 있는 아이니까.

  일어나서 또 걱정하겠지. 이것을 어쩌면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말이야. 난 우스운 표정으로 화답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하고, 네게 그것을 먹이고, 나도 먹고, 나비를 몇 번 쳐다보다가, 익숙한 듯 학교에 가겠지. 우리가 함께 있는 곳, 우리에게 어떤 아픔이 있든 제쳐두고 교과서와 급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그런 학교. 빛이 너무 들어차는 교실을 풍경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장소. 난 너와 거기서 만났어. 하지만 난 너를, 내 할매와 너희 엄마가 있는 곳에서 만났다고 생각해. 죽어가는 것들뿐인 병적인 곳에서, 내가 너를 만난 거야. 우린 모두 시간을 먹어치울 뿐이니까. 어차피 먹어치운 건,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올 수 없으니까. 추억이나 풍경을 만들 수 없는 그런 장소에서,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공간에서 우린 만났어. 우린 누구보다 어려운 곳에서 만난 거야.

  진지한 것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널 본 이후로 난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할 수 있었어. 너를 찌질하다고 쓴 건 사실 더 찌질한 내가 쓰기엔 많이 부끄럽지만 이 글을 읽고 화내지 않았음 해. 안녕. 잘 자. 고마워.     


  나는 노트를 덮었다. 정애가 눈을 떴다. 정애는 반듯이 돌아누워 아에이오우- 하며 입 운동을 하더니 상체를 들었다. 내게 잘 잤냐고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간단히 밥을 먹고 나가자고 말했다. 정애는 화장실로 향했다. 닫은 문틈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있을 때 나오는 소리는 무엇이든 온기로 바뀌었다. 난 달걀을 부치고 봉사단체에서 배식받은 김치를 꺼내 뭉덩뭉덩 썰었다. 물을 너무 적게 넣어 고슬고슬한 상태가 된 보리밥을 그릇에 덜어냈다. 난 보잘것없는 것들을 준비하며, 미소지었다.     

  정애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어중간하게 뜬 해는 버스 안 사람들을 데웠다. 많은 소리가 들어찼다. 난 정애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 눈을 감았다. 몇 정거장 후면 내리겠지만, 어떤 소리든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염희야, 이생한 생각하지 마."

  "무슨 생각?"

  "약해지지 말라고."

  "그래. 그러자."     


  정애는 두렵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화장실에 가고 밥을 먹는 과정이 정애에겐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나. 무언가를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에서 내가 부끄러움을 포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노력. 우리의 관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 내 죽음을 최대한 멀리 늘어뜰이려는 노력. 그런 노력을 알게 된 나로서는 두려워할 수 없었다. 두려워하면 안 됐고, 결과적으로 죽어선 안 됐다. 부끄럽게도 정애로 인해 설득당한 것이,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은 아닌가.

  정애는 부저를 눌렀다.     


  수업이 끝나고 정애와 나는 번화가로 나갔다. 빙수집에 들어가 과일 빙수를 먹었다. 졸려, 따분해, 이 노래 알아? 초콜릿 먹고 싶어.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다. 스티커사진을 찍는 곳에 들어가 우스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색이 바랜 사진이 현상됐다. 방금 찍은 사진에도 그간의 시차를 보여주듯 얼굴 주변에 갈색 줄이 가있었다. 정애와 나는 사진을 반 개씩 나눠 가졌다.

  우린 오후의 거리를 걸었다. 발이 닿는데로 가보니 망원시장이 나왔다. 할머니들이 나물을 파는 곳이었다. 제대로 된 좌판도 없이 아스팔트 바닥에 물건을 늘어놓았다. 쪼그려 앉은 채 그녀들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올려다 보았다. 정애는 교복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몇 장을 꺼내 그녀 중 한 명에게 건네더니 "고춧잎, 할머니 고춧잎이요." 라고 했다. 나이든 여자는 고춧잎을 한움큼 집더니 구겨진 봉투 속에 눌러 담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양을 정애에게 건네며 "오천원이야." 라고 했다. 정애는 주머니 속에서 천원짜리 두 장을 더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돈을 낚아채는 그녀의 손이 불길하게 주름져 있었다.

  정애는 웃으며 봉투를 받았다. 조잡한 소리가 나는 봉투를 들고 정애와 나는 걸었다. 우리가 지나친 곳에서 늙은 여자들은 왜 자기 물건은 사지 않는지에 대해 툴툴 거렸다. 나는 정애 손을 잡았다. 시장을 빠져 나왔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애야, 무섭지 않니."

  "뭐가?"

  "세상이, 우리가, 저런 할머니들이 말이야."

  "아니. 무섭지 않아."

  "그럼 넌 뭐가 무서워?"

  내가 물었다.

  "난 후회 하는 게 무서워."

  "혹시 나와 이렇게 된 걸 후회하니."

  "아니. 그렇지 않아. 후회는 늘 지나서 해. 시간이 더 지나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세월이 흘렀을 때, 문득 후회하는 날이 와. 무엇이든 말이야. 내가 발명가가 된다면, 바로 이전날 기억을 지워주는 기계를 개발할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럼 그 기계를 개발해서 어떻게 쓸거야?"

  내가 물었다.


"네가 네 삼촌에게 당한 나쁜 기억들을 지워줄 거야."

"너도 사용해야지."

"난, 너를 만난 것을 혹시 후회하게 된다면, 후회하는 기억을 지울 거야."

"넌 참 어려운 생각들을 해."

내가 말했다.


  "겸손한 방식인 거야."

  "그런 기계를 개발하면, 항상 시간을 먹어치우는 기분이 들겠다."

  "그거 나쁘지 않네. 난 내가 살았던 시간들이 아주 없어져버린다면 어떨까, 생각도 하거든."

  "왜?"

  내가 물었다.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그럼에도 남들보단 얼마나 조금 덜 불행한지, 곱씹게 되잖아."

  "기억이란 게 꼭 그런 기능밖에 없을까?"

  "기억을 두고, 진짜로 겸손해 지는 걸 배우긴 힘들어. 쪽팔림을 배우는 게 더 쉽지."

  "자꾸 어려운 말 하지마. 머리 아파."

  내가 말했다.


  "사실 어제, 널 앞에 두고 내가 너보단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를 보듬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난 지금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기계가 필요한 순간이네?"

  "응." 정애는 고개를 숙였다.

  "예전의 너랑 달라. 눈치 많이 보던 정애 맞니.” 난 정애 손을 더 세게 쥐고 말했다.     

  "네 불행을 두고 함부로 위안 삼지 않을게. 그건 겸손해진 게 아니라,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일테니까."

  정애가 말했다.

     

  정애 손에 들려있던 나물봉투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해가 저물었다. 건물 머리 위로 그을음처럼 노을 색이 입혀졌다. 두둥실 뜬 색처럼 모호한 하루였다. 정애가 말한 기계따윈 없어도, 당장 내일이 되면 모든 걸 잊을 것 같았다. 시간은 어떻게든 돌아오지 않으니까. 기억은 비틀리고 그것에 후회해도 어차피 우린, 사랑했던 것과 기억했던 모두를 잊어 갈 것이다.

  나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고요할 정, 사랑 애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