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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Jun 03. 2019

스물 아홉이 지나고 있다.


스물아홉 번. 생일이 지났다. 사람의 나이로 스물아홉 해를 산 것이지만 살아낸 만큼 적응한 것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들 발자국 소리는 무서울 때가 있고 상냥하다가도 느닷없이 얼굴을 바꾸는 타인이 두렵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위해도 순간의 토닥임밖에 되지 않는다. 타인과의 공통점을 두려움, 이라고 칭해버리면 각자의 두려움만 남는다. 혹은 두렵지 않기 위해 외면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잠깐은 넘길 수 있다.


수많은 외면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망각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감히 알 수 없다. 여러 해가 지났고 여러 번 하루를 사는 거지만 그다지 바뀐 것은 없이 오늘도 오늘을 지겨워한다. 물론 나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아니,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아는 것은 없다. 나를 제외한 타인을 다른 습성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오만함이다. 그러니까 난 타인을, 모른다.


문득, 십년 전을 돌아봤다. 햇수론 십 년, 생일로는 열 번의 생일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때도 나는 하루하루를 산다고 생각하며 산 것 같은데, 돌아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땐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 부모가 늙어간다는 것, 친구가 멀어진다는 것, 혹은 친구가 가까워 진다는 것, 다시 어색해진다는 것, 아무리 마음을 열어도 내게 마음을 열지 않는 타인도 있다는 것, 지친다는 것, 귀찮아지고 무색해진다는 것, 세상엔 정말 다양한 존재가 있다는 것, 그럼에도 인간사라는 것, 세상엔 즐거운 것이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세상엔, 그저 잠깐의 외면, 가식과 즉흥이 만들어낸 즐거움과 가려진 슬픔, 죽음, 이별과 애도가 있다는 것. 인간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작두를 타듯 휘청이고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지나간 십 년 안에 있었다.


분명 학생이었을 그때, 지금의 내가 지금의 나 같은 생각을 하며 지금의 나 같은 삶을 살고 있으리란 상상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씁쓸한 일이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또 십 년 뒤엔,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다. 그다지 늙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중년, 이라는 사람의 나이로, 지겨운 어른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그저 어떤 부분엔 조금의 균열이 있고 어떤 부분은 조금 좋아진 인격으로 지겨워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괴로운 것들을 나열하며 그런 것들로 부족했던 하루를 변명하며 그 순간 옆에 있는 사람과 하루 한 끼를 나눠 먹으며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살을 맞댄 사람이 누구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상관없이.


예전 어느 때엔, 이루지 못한 것을 이뤄내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인 것만 같았다. 그것을 따내려는 열정으로 살다 보면 아주 많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소망, 그런 것 말이다. 반대로 그렇게 살다 보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절대적인 답이 나오는 삶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걸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알게 되었다. 그럴 때, 자괴감도 느꼈다. 변명도 했고 비겁해져도 봤고 구체적인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 시간을 두고 글자나 몇 자 끄적여보기도 했다. 글이라는 게, 마치 그런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바보 같은 인간을 두고, 형편없는 인간사를 두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뤄보려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바로잡아 보려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조금 무색해졌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내가 만든 희망이나 목표 따위가 아니라 그저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관망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것마저 또 바뀔 수 있단 것이 두렵지만 말이다.


세상에 많이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마다 스물아홉이든 열아홉이든 여든아홉이든, 비슷하게 느껴진다. 강해 보이는 사람도 수많은 외면을 통해 그렇게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 순간이 사람을 강인하게 만들어준다.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다움, 인간적인, 이란 말들도 오만함을 포장하기 위한 좋은 ‘인격’ 코스프레 같다. 동물들도 언어가 있고 감정이 있고 사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곤충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실험이 있다. 모든 생물체가 하등하거나 고등하지 않은 것이다. 때에 따라 외면을 잘하니 힘이 세진 것뿐. 그럼에도 인간만이 가진 다른 점 이라고 한다면, 후회나 반성, 꾸준함,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자꾸만 인간적인 것을 나누려 했던 시간도 오만함을 핑계대기 위한 좋은 구실을 찾으려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더 뛰어나서 더 이룰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물아홉 해를 살든 여든 아홉해를 살든, 삶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저 꾸준하게 적응하려 한다. 즐거움도, 신비로움도 없는 계절을 때로 슬퍼하고 때로 웃으며 때로 외면하기도 하면서. 문득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해서 보지 못한 것들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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