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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Sep 16. 2021

아마존 프라임 미드 'them'(그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흑인 대이동' 이라는 용어가 있다. 성경의 출애굽기이자 엑소더스(exodus)인 '대이동'이란 용어가 흑인과 호응하는 시절이 있었다. 스스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뽑아 어디든 옮겨 놓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그들은 총구를 마주한 사냥감이자 공을 앞에 둔 볼링핀신세였다. 흑인이니까. 흑인이어서. 누군가에겐 그것이 이유가 되기도 했다.


히틀러가 우생학을 이야기하며 유대인을 사멸시켰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검정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의심해야하고 간혹 감정이 격해진다면, 끝내 처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노예제와 그것의 폐지를 주장한 링컨이 명백한 증거였고, 이후 나온 여러 예술작품과 다큐멘터리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사료로 작동한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하는 미드 'them'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로스앤젤레스 근린으로 이동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막내 아들까지해서 총 다섯 식구였다. 하지만 갓난아기였던 막내는 백인 노인의 손에 죽어버렸고 잔인한 죽음을 엄마 러키는 직접 목도했다. 괴한의 습격때문에 손 쓸세도 없이 눈 앞에서 아이가 죽었다. 그저 흑인이라는 이유로. 흑인 아이는 성장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있게 돼서 있게 된 것 뿐인데 백인에겐 그들이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가해를 하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위해를 한다. 행동하는 자들이었던 백인. 두려운 존재는 과연 흑인이었을까.



물론 모든 백인이 위해에 가담했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수 백인의 상황을 다룰 필요는 없다고 본다. 피해 받은 입장에선 그들이 가해 행동을 했든 하지 않았든 다 같은 백인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피해 받는 사람이 예외적인 상황까지 고려할만큼 아량을 베풀 순 없다.



드라마 속 주인공 가족 구성원은 모두 각자의 상황에서 가해를 당한다. 각자 백인에 대한 공포심이 있고 그들 내면에는 백인을 향한 편견과 두려움이 자리한다. 이사온 첫 날 대놓고 떠나라는 시위를 벌이는 백인 가정들과 흑인 직원은 거의 고용하지 않는다는 직장 상사, 발표를 하면 무안함을 주는 동급생들까지. 그들 주변에 도사린 혐오와 공포의 자극제는 충분하다. 아기가 죽었고, 남은 가족끼리 편견에 맞서려고 하지만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려는 훼방꾼들이 여전히 너무 많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가 집중하는 부분이 하나더 있다. 백인들의 편견 속에서 점점 더 병들어가는 그들(them)의 모습이다. 그들은 밖에서 오는 차별과 혐오때문에 스스로에게도 어느덧 족쇄를 건다.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를 따라 웃고 말을하고 겁에 질려 울기도 한다. 그 존재는 유령인지, 각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인지, 아니면 정말 타인인지 모른다. 그들이 가해를 받을 때마다 주변에 영혼처럼 떠다니는 또 다른 존재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무력해진다. 아마 그 존재를 또 다른 그들(them)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속에선 누가 주체인지 모른다. 백인이 주체라면 them은 흑인 가족이 될 것이며 흑인 가족이 주체였다면 them은 기묘한 유령일 것이다. 아니면 백인 집단이 them일지도 모른다. 아수라장 속, 러키 가족은 매일 사투를 벌인다. 그들의 외로운 투쟁은 네 명이나 있는 그들 가족끼리도 치유해줄 수 없다. 각자가 이겨내야 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실질적인 도움따위도 애초에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선, 아무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시청하는 입장에서 아기가 죽는 장면이 가장 충격적이었는데, 그런 아픔을 딛고도 변화된 게 없는 현실에 살아야 하는 러키 가족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내면적으로는 이상한 환영에 시달려야 하고, 외부에서는 백인의 눈총을 받아내야한다. 그나마 러키와 헨리가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가끔씩 속시원히 백인들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만 그 또한 그들에겐 힘겨운 발버둥이었을지도.



사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제작한 내용이라 마지막회까지 러키 가족이 어떤 승리를 거머쥘지는 확신할  없다. 이렇게 하루하루 투쟁하고 버티다가 어느 순간 서서히 변해가는 사람들의 인식을 마주했을지도 모르고, 서서히 말라가는 스스로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시청하는 중에 제3인의 입장이라고 자꾸만 나를 그들한테서 격리시켰지만 나 또한 그들(them)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가해를 하는 입장이든 피해를 받는 입장이든 내게도 무언가가 혼재돼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 사실 더 집중하고 싶은 건 내가 누군가에게 가해를 가한적은 없는가 이다. 무지하고 안일했다는 핑계로 마음 속에서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해왔던 건 아닐까. 그게 편하다는 이유로. 그게 나를 우월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착각으로 말이다.



드라마가 끝나면 너무 자극적이어서 논란이 되기도 하는 문제의 장면들에 '거부감'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그들(them)을 보고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을까. 잘못된 것은 반복하지 말자고. 절대 누구도 피해 입지 않아야 함을 기억하자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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