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파벨만스>를 봤다. 평이 높아서 예고 없이 보게됐는데 며칠이 지나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내가 예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는 걸 알려줘서인 것 같다. 아니 실은, 사랑했다기보다 조금 흉내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의 얼마 안 되는 멋진 부분만 뽑아서 내것으로 삼고 싶어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절대로 통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부분을 하나쯤은 만들어 놓고싶은 심보였는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를 이해 못하길 바라면서 정작 이해해주지 못했을 때는 슬펐다. 그러면서 또 다시 이해받지 못할 사람이 되고만 싶었다. 그게 나를 특별하게 해줄 것만 같았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다.
언제부터 그런 시절을 잊고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봤다고 다시 그걸 잊지 않는 삶을 살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난 계속 잊을 거다. 잊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거다. 그게 조금 더 편할지도 몰라서다. 조금이라도 더 튀지 않게 해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줄 것 같아서. 무엇에든 미친듯이 매료되는 것보다 안전한 것에 더 끌리는 시기도 오는 거라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다. 난 더이상 동요하고 싶지 않고 복잡하고 싶지 않고 그런 게 온다 하더라도 금방 이겨내고 싶다. 그런 인간이 강하고 건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 생각이다.
근데 자꾸만 잘못을 하는 기분이 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딘가에 조금씩 잘못을 저지르고 사는 기분이 든다. 매일 그런 건 아니고 가끔씩 이런 게 훅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뭔가에 잘못을 하며 사는 기분. 그래서 아주 잠깐동안은 당당해지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때. 어떤 말을 해도 가식 같고 위선같고 포장하는 것 처럼 느껴지게 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잘못한 감정을 감추려고 화장이 번진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파벨만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 며칠 내내 이런 생각들이 떠나질 않는다.
어쩌면 난 영화에 매료됐다기 보다 한 사람을 보고 부끄러운 감정을 느껴서인것도 같다. 그래서 잘못한 것도 없이 잘못한 것만 같고 나는 절대 이 잘못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인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그냥 조금 '어른 답게'사는 것 말고는 자신이 없어진다. 그나마 자신 부릴 수 있는 게 어른 '처럼'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니 살짝 외로워지기도 한다. 그마저도 힘든일이고 대단한 일이라고 토닥이기까지 하겠지? 자기개발서나 에세이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들 처럼 말이다.
영화에 대한 스포는 안 하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는 보지 않고는 말 할 수 없는 영화고, 보지 않은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는 영화며 보아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화다. 여기서 몇 자 찌끄려봤자 어른 '처럼' 사는 내게 살짝 살짝씩 반하는 순간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건, 현실과 영화를 동떨어진 세계로 보고싶어진다는 거다. 난 현실이 고달플수록 영화나 책, 노래같은 것들로 도피하는 습관들이 있었다. 언젠가부턴 그게 잡다한 공부로 바뀌기도 했지만 여전히 예술은 나 하나쯤 도피할 구멍은 넉넉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예술을 사랑했던 건데 내가 예술 없이는 못 사는 예술가라 사랑한 거라고 착각하며 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난 살다가 힘들 때면 어쩌다 한 번 예술에게 위안같은 거나 받는 그저 그런 어른일뿐인데.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우선했나보다. 현실에선 현실을 살고 영화에 빠지고 싶을 땐 빠지면 된다. 굳이 도피처로 생각할 것도, 그렇다고 아주 밀어낼 것도 없다. 현실과 영화 둘 다 서로에게 해결책은 되어줄 수 없을 거다.
난 앞으로도 의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같은 사람이 만든 예술품을 보고 감동 받고 위로 받고 의지하고 가끔 리뷰라고 떠들어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을, 어른이 될 거다. 절대로 시청자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시청자로만 남으려 했으면서 시청자 이상의 애정이 있었던 것처럼 살았던 시절이 부끄러워지는 거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고달픈 현실에 속한 불쌍한 자기 자신에게 도취하지 않고 그런 현실을 '사건'과 '이야기'로 담는 사람이 되려고 할 때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예술과 동일시 하지 말고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해할 때, 서로가 상부상조하고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냥 다른 공간의 개념으로 인식할 때, 그런 예술가가 보여주는 세상을 오히려 안전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본 영화 중 <파벨만스>가 이런 느낌을 가장 잘 전해준 영화였고 이렇게나 슬프고 외로운 이야기를 이렇게나 안전하게 즐길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마음에서 잘 떠나지 않는 작품이 정말 좋은 작품인 것 같다. 그게 찝찝함을 남기든, 행복감을 남기든 외로움을 남기든, 자꾸만 마음 속에 맺혀 잘 사라지지 않는 작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