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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Jan 02. 2017

마흔 두번 째 잔 - 시작

2017년입니다. :)

시작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내겐 시작이 그랬다. 모든 것의 시작은 모든 기회였고 시작에 앞서서 준비돼있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연히 찾아온 시작들에 몸둘바를 몰랐던 건 사실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성인으로서의 시작이었다.

20살이 되는 건 예고를 잔뜩 주고 찾아왔다. 그냥 열아홉에서 나이만 먹으면 스무살이 됐던 시절이었으니까. 혹은 펜대를 놓고 술잔을 들어도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들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환상과 그것을 얼마나 세련되게 들어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포부가 가득했던 20살이 그렇게 시작됐다.

9살과 10살의 차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19살과 20살의 차이는 많았다. 20살이 된 후 내 의지대로 내가 하고싶은 것을 조금은 해도 되는 신상이 생겨버렸다. 더 이상 매일 같은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어색했던 친구와 더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과 좋아했던 친구를 모의고사를 보는 전쟁터에서 떠나 자유로운 술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해방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시간적인 여유까지. 난 어른이 됐다.

그렇게 20살이 돼서 당당한 마음으로 술을 마셨고 호기롭게 버스요금을 더 냈고 무용지물로 지갑 속에만 쟁여뒀던 주민등록증을 자주 꺼내보여야하는 시간들을 소중히 아꼈다. 꽤 가치있는 어른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조금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시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끝까지 가려면 반이 더 남았다는 뜻이었을까.

어느 순간 고민거리가 많이 늘어버렸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많아졌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 하나 둘 씩 늘고 있다는 중압감으로 나를 눌렀다. 어떤 준비도 없이 맞아야하는 것들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기에 앞서 우연히 찾아온 기회이기도 했는데 난 어떤 준비도 돼있지 않았다.

더이상 매일 몸을 부대끼며 숙제를 알려주던 친구도, 나를 압박하던 시간표도, 모의고사 성적표를 기대하는 엄마의 눈빛도 사라졌다. 모든 것엔 내가 중심이었고 그건 내가 모든 것에 책임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코팅된 지 얼마 안 된 민증을 들고 친구들과 야간 노래방을 가고 맥주 한 잔을 하고 성인영화를 볼 수 있는 것밖엔 없었는데.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것을 잃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2017년이 시작됐다. 세상은 매번 같은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매번 같은 제야의 종을 울렸다. 우린 매번 같은 떡국을 먹고 나이도 같이 먹는다. 19살에서 20살이 되면 많은 것이 달라져있을 줄 알았던 두근거림에 붙는 굳은살의 두께만이 달라졌다. 여전히 우린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고 해야 할 것들만 많은 일상을 살고있다. 가까웠던 지인이 먼저 하늘로 가도 우린 육개장을 먹으며 또 한 번 살아나온다. 변화는 없다.

그럼에도 우린 억척스럽고 바보스럽게 조금의 변화를 주려고 운동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새로운 물건을 구입한다. 그것이 노력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움직인다. 그렇게 또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다.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늘 진지충이되는 세상에서, 아직도 외향적이고 살가운 사람들만이 주목받는 사회에서 여전히 변화없는 시작을 해본다. 2017년은 우리 모두에게 같은 시작이다. 어떻게 살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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