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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May 24. 2017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리뷰

일그러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영웅은 세상을 구한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구축했다. 그럼에도 그는 몰락했다. 세대가 바뀌어서 그가 몰락한 것이라면, 그에겐 ‘세대도 바뀔 수 있다’는 자각 하나만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석대의 세상은 모두가 힘을 합치는 방법을 깨달은 후에 시작된 반란으로 부서진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한 사람의 지도자는 여러 명의 추종자가 만들었고 단 한 사람의 몰락은 정확한 ‘타이틀’의 지휘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 시작됐다는 것.
 석대는 ‘급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시험이나 자격으로 부여받은 타이틀은 아니었고 아이들이 갖고있던 두려움을 먹고 자란 헌신으로 부여됐다. 그리고 영리한 그는 ‘급장’이상의 것을 실어준 ‘구담임’의 무책임에 의해, 보여지는 타이틀 너머의 힘을 갖게 됐다. 그에 반해 ‘김선생’이 가진 ‘선생’이라는 타이틀은 분명한 자격의 힘까지 가세해 만들어진 ‘진짜 타이틀’이었다. 어떤 권위나 명예도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추가적인 검증 없이도 단숨에 여러 명의 이목을 이끌 수 있는 타이틀. (선생이라는 자격의 힘을 포기한 구담임과 그 타이틀의 힘을 십분 발휘한 김선생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김선생’이라는 타이틀을 따라 움직인 반 아이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따라야 할 사람(대세)을 바꾼 것에 불과했다. 권력의 힘은 보이지 않게 이동했고 다수의 ‘연대’를 통해 살이 붙었다.
 이러한 구조는 얼마 전 봤던 영화 <보안관>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최대호’는 어떤 자격도 없지만 ‘전직 형사 출신’이라는 명분과 성실한 의리를 보여주는 ‘성격’ 덕분에 작은 마을의 보안관 임무를 담당한다. 하지만 그는 곧 비치타운 건설을 위해 들어온 사업가 ‘구종진’의 기세에 마을 사람들의 헌신을 하나둘씩 잃어간다. ‘구종진’은 ‘수십억대 매출의 성공하는 사업가’, ‘마을에 이득을 가져다 줄 비치타운 건설의 사장’이었다. 힘의 이동은 ‘더 좋은’ 타이틀 하나면 충분했다.
 이렇게 보면 ‘석대’를 향한 ‘병태’의 배반이 쉽지 않았던 상황도 이해가 간다. ‘병태’는 자신이 굴복할 만큼 견고했던 ‘석대’의 권력이 단순한 힘의 이동만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여러모로 허망했을 것이다. ‘병태’는 처음 ‘석대’에게 대항할 때도, 결국 그에게 굴복을 할 때도, 그리고 그가 몰락할 때도 끝까지 투지를 불살랐던 단 한 명의 인물이다. ‘병태’만은 자신이 어떤 신념을 따르든, 따르겠다고 굳힌 이상 그것에 대한 배반엔 답답할 만큼 더뎠다. 한낱 자존심을 부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의 행보를 응원하게 될 만큼 그 치기는 강했다.
 그럼에도 병태의 신념 또한 ‘자신이 이룩해낼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갈망의 좌절’로 만들어진 것이었던 점이 조금 아쉽다. 병태도 진정으로 ‘석대’의 세상을 인정한 뒤 굴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도 대접받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좌절한 것이었으니까. ‘병태’가 꿈꾸는 합리적인 세상이 왔다면 그는 꽤 높은 자리에 앉아 다수의 동경을 받는 입장이 됐을 수도 있다. 석대와 다른 점은 그가 ‘합리적인 세상’에서의 ‘권위’를 꿈꿨다는 사실 뿐이었다.
 영웅도 스러지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연대고, 다시금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도 ‘인간’의 연대다. 그리고 그 연대는 어떤 ‘타이틀’을 향한 경외로부터 나온다.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이렇게나 유한한 존재고 모두가 같은 부족함을 가졌다면 대체 영웅 따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세상은 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때워야 하는 걸까. 혼자서 영웅이 될 수 없을 바엔, 우리 개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그러한 공간 또한 비슷한 비율로 나눠 가진 각자의 힘이 같은 수단으로 발휘됐을 때 만들어 진 곳이어야 한다. 단 한 사람이 구축한 세상은 더 이상 영웅의 세상이 아니다. 그저 강압으로 만들어낸 작위적인 철창 속일 뿐이다.
 어른이 된 ‘병태’는 몰락한 석대의 세상에서 나와 그의 추레함을 봤다. 잠시나마 자신이 믿고 따랐던 힘의 비참함은 그에게도 통쾌함 따위로 자리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린다.
 - 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울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 <108p>-
 그 눈물엔, 다시 말해 ‘내가 영웅이 될 수 없을 바엔’, 이 세상은 차라리 특출난 능력의 한 사람이 권좌에 앉아 구축할 수 있는 단순한 공간이 되길 바란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영웅은 일그러졌지만 세상을 주무르는 새로운 힘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그러진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의 헌신이 아닌, 자신의 입에 맞는 세상을 구축해내려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손을 경외하는 다수의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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