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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May 15. 2017

소설 <태연한 인생> 리뷰

다시 읽은 <태연한 인생>이 준 모순

 작년 5월, 제주도로 여행을 갔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질 때 쯤 결정한 일이었다. 막내딸로, 여자로, 취준생으로 살다가 아무 것도 아닌 나로 살아보자고 며칠을 생각하다 결정한 게 고작 제주도 3박 4일이었다. 누군가 바라본다고 느낀다면 부끄럽지만, 그 때의 제주도행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홀로 떠난 여행이었다.
 많은 의미가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아둔 돈으로 시간을 버리려고 떠나는 여행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반복을 막무가내로 뒤로한 채 어떤 이상적인 곳으로 향할 수 있게 하는 것엔 여행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 확연한 선을 그어놔야 돌아올 때 아련한 서사 하나쯤은 만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의미도 내가 부여하고 거둘 수 있게끔 아무도 없이 하는 여행을 택했고 난, 돌아올 때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지금, 이 별것 아닌 여행에도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태연한 인생>의 ‘류’와 겹쳐지는 지점이 나에게도 적당히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류’처럼, 엄마와 아빠의 반대되는 서사를 봐왔지만 모두 부정해버리고 ‘요셉’을 떠난 것과 같은 아련한 서사는 내게 없다. 그럼에도 ‘류’의 행동이 이해가 간 이유는 어쩌면 이 세계는 소설 속 인물이 살기에도, 현실 속 사람이 살기에도, 사실 모순덩이로 가득한 패턴이 많다는 걸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세상의 모순을 한 몸에 보여준 인물이 ‘요셉’이었다. ‘요셉’은 패턴과 통속을 이기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한 존재라는 체념과 모름지기 작가란 극단성과 데까당스를 갖춰야만 한다는 결연함을 마음속에 동시에 갖고 있는 작가였다. <P239> ‘류’는 그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에 끌렸고 자신의 부모 두 명의 모습을 섞어놓은 것 같은 ‘요셉’의 매혹을 잠시나마 믿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어린 ‘류’가 경험했던 아버지의 매혹과 흡사했고 세상의 어떤 감정과 매혹도 익숙한 여느 누군가의 패턴에 맞물려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류’는 매혹의 강인함보다, 그 후 매혹의 소실점이 주게 될 고통보다, 외로움을 택했다. 그렇게 ‘류’는 고독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노래할 수 있었다고 소설은 말한다. 어쩌면 ‘류’가 모순덩이의 ‘요셉’을 떠난 것은 모순덩이의 이 세상을 떠난 것과 같은 의미라고 봐도 될까.
 결국 택한 사람의 결정에 따라 삶은 흘러가게 돼있고, 누군가는 자신이 택한 대로 그것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정말로 그렇게 살아가려 노력하기도 한다. 마치 ‘류’의 엄마처럼.
 나에겐 '류’의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동시에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류’의 아빠처럼 되고 싶은 ‘류’의 엄마 같은 사람이다. 다수 속에서 우린 옆에 있는 사람과 말하며 맞장구도 쳐야하고 상대가 밥을 사면 나는 커피라도 사야한다. 이런 구태의연한 인간사의 패턴 따위가 가끔은 소름 돋을만큼 치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던히도 맞춰가는 이 패턴을, 누군가가 말도 없이 깨버린다면 고통스럽다. 패턴에 합류하든 매혹을 따르든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남겨지는 날카로움이 싫다. 난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이건 ‘요셉’의 모습과도 겹친다.
 이런 내가 싫어 떠난 여행이었다. 고통 받지 않고 시간을 써버리자고 떠난 제주도여행은. 불과 일년전에 처음으로 혼자 한 여행이었지만 이런 내가 싫었던 건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돌아올 때를 위해 떠났던 여행이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달라져 있지 않았다. 끌어안을 아련한 서사도 딱히 없었다. 이상적인 것을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조차 핸드폰으로 내내 지도를 봤고 예약한 곳에 가서 밥을 먹었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라는 명목상의 예의로 웃음과 배려를 팔았다. 매혹을 안고 떠난 곳에서 난 패턴에 합류했다.
 시간의 흐름에 내 변화를 걸어본다면, 그 후로 일년이 지난 지금 난, 어떤 모습인걸까. 그저 하루는 고독 속에서 살다가 그것이 지루할 땐, 또 하루는 최대한의 패턴을 읽어 누군가와 연대를 하면서 다가올 고독을 피하는 방식으로 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도경'처럼 하하 호호 웃으며 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도경'같은 인물이 이 세상의 지긋지긋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람은 아닐지. 그럼에도 '도경'이 부럽지 않은 이유는 결국 인생은 어떤 장소나 스토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패턴에 적응해버리는 우리의 게으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그것도 아주 성실하고 꾸준하게. 난 매혹을 따르면서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끊을 수는 없는 게으름으로 안전하게 고통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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