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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종의 연대 Feb 05. 2023

야생동물과 인간의 만남이 야기하는 윤리

Lori Gruen, <Ethics and Animals> 6장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문명’과 밀착한 반면 야생과는 동떨어진 듯 보인다. 그럼에도 인간과 야생동물은 서로 만나고 마찰을 겪으며 생태‧문화적 역사를 함께 구성해 왔다. 상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고대 신화에서 동물과 인간의 조우는 운명적이며 결정적인 사건으로 묘사되곤 한다. 보다 일상적인 차원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반쯤은 ‘도시화’한 이웃인) 길고양이가 놀라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그들에게 조심스레 다가간 경험이 있다. 야생동물과의 만남은 인간에게 놀라움이나 즐거움으로, 때로는 위협이나 불편함으로 다가오며 심지어는 당황스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반면 야생동물에게 인간의 접근은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로리 그루엔은 우리와는 모습도 습성도 다른 낯선 인격체와 만날 때 발생하는 윤리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루엔은 여성 침팬지인 류드밀라(Ludmilla, 이하 밀라)의 삶을 언급한다. 밀라는 카메룬의 육류시장에서 죽은 엄마의 곁에서 1970년대에 발견됐다. 이후 인간 부부에게 팔려 키워졌으나 몸집이 커진 뒤로는 술집의 구경거리로 살아가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생추어리(sanctuary)에서 남은 삶을 보내게 된다. 그전까지 인간의 영역에서 포획된 채 살아왔던 밀라는 생추어리에서 낯선 야생의 삶을 처음으로 영위하며 동종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밀라의 삶은 야생동물과 인간의 연결이 길들임과 착취로 이어진 불균형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루엔이 지적하듯, 인간은 야생의 영역을 침범하며 삼림을 황폐하게 만들고 다른 종의 삶을 위협해 왔다.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에서 중앙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부터 이곳의 삼림은 갈수록 파괴되어 침팬지를 비롯한 동물들은 절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루엔은 이주민 인간이 자행한 벌채와 개발로 인해 동물의 생존이 이처럼 어려워졌다고 비판한다.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자원은 고갈되는 한편, 침팬지는 서식지를 잃고 밀려났으며 밀렵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 침팬지를 죽이고 밀라와 같은 아기 침팬지들을 판매해 수익을 내는 밀렵은 가히 산업을 이룰 정도였다.


인간은 더 많은 땅과 자원을 향해 이주하며 원래 그곳에 거주하던 야생동물들을 몰아내고 착취했으며 팔아넘겼다. 그루엔은 인간과 동물의 만남이 이처럼 불평등한 구도 위에서 이뤄져 왔다고 지적한다. 이는 인간과 야생동물의 조우가 철학적 또는 물리적인 갈등을 수반하며, 각종 윤리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개별적인 (삶의 질과 관련된) 동물 인격체와 (종 보존 및 서식지와 관련된) 종으로서의 동물에 달리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의 판단이 철학적인 갈등을 야기한다고 본다. 그리고 글로벌 환경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험적인 갈등 역시 복잡한 윤리적 논쟁을 불러온다고 덧붙인다.


특히 동물종의 절멸(멸종)은 생태 다양성의 위기를 암시하는 징후로서 점차 심각성을 띠어가고 있다. 종 보호에 개인이 힘을 보태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루엔은 정책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보편적인 인식을 일깨우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IUCN(자연보존을 위한 국제연합,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나 WWF(세계 야생의 삶 기금, World Wildlife Fund), UNEP(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 국제환경연합) 등의 중요한 조직들이 대중적이면서도 국제적인 차원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환경과 개발에 대한 유엔컨퍼런스(지구 서밋, the Earth Summit)는 전지구적이면서도 국가적인,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태 다양성의 손실을 막기 위해 168개국의 동의를 얻어낸 성과였다. 그럼에도 그루엔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20세기 후반부터 동물 종의 멸절이 꾸준히, 그리고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경고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바 코뿔소(Javan rhinoceros)와 같은 거대동물의 멸종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만행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들의 뿔이 (실제로는 미미한 효과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약용으로 암시장에서 팔리는 통에, 인도네시아의 자바 코뿔소는 거듭된 밀렵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코끼리, 오랑우탄, 양쯔강 돌고래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루엔에 따르면 더 많은 종의 포유류와 조류, 도마뱀 등의 파충류, 어류가 지구상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이에 그루엔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지금 존재하는 상당수의 동물들을 모르고 자라날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그때쯤이면 멸종해 버릴 ‘코끼리’가 무엇일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과 개체로서의 야생동물이 사라져 가는 현상 너머, 우리는 어떤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야생동물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입장에 서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루엔은 멸종 위기에 놓인 종으로서의 야생동물과, 삶의 질이라는 문제와 연관된 개체(생명체이자 인격체)로서의 야생동물을 고려하는 관점이 서로 구별된다고 본다. 이 책의 지난 장을 통해 그루엔은 동물 개체의 삶(삶의 질과 사회적 관계, 인격, 고통과 행복…)과 그들의 개별성(particularity)이 지니는 가치에 중점을 두었다. 다만 이 장에서는 특정한 범주로서의 동물 ‘종’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루엔이 넌지시 지적하듯, 이처럼 개인이 아닌 종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은 인공적 범주를 통해 동물을 도구적인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특정한 동물 종은 생태 다양성을 구성하고 그에 기여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어떤 종은 생물학적‧의학적‧유전학적‧과학적인 계획의 영역에 이바지하는 존재로, 그 종의 절멸은 생태학적 불안정성의 지표로 읽힐 수 있다. 또한 생태 다양성의 가치를 고려하는 인간의 관점은 멸종 위기에 처한 모든 종의 동물을 동등하게 가치매기지도 않는다. 못생기고 성가신,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종(멸종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이를테면 모기와 같은)의 가치는 쉽게 간과되기 때문이다.


동물을 종으로 범주화하는 관점은 이처럼 복잡한 윤리적 질문에 맞닥뜨린다. 도덕적 전체주의(ethical holism)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또는 좋고 나쁜지) 판단할 수 없다. 도덕적 전체주의는 방침‧경험상으로 도덕적 평가에 앞서 전체로서의 생태계를 상정하며, 인간을 (특별한) 개체가 아닌 전체적인 생태 공동체의 한 종으로 위치지우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관점에서는 홈즈 롤스턴(Homes Rolston)이 그랬듯이 종으로서의 동물이 개체로서의 동물들보다 가치 있는 범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개인’(동물)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태계’에 ‘기여하는’ 종들만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그루엔은 생태계라는 다소 동질화된 상위 범주를 위해 특정한 동물 개체, 심지어는 종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그것은 종과 개체, 그리고 종들 간을 불평등하게 가치매기며 특정한 종의 위협을 정당화시킬 가능성도 지닌다. ‘도덕적 전체주의자’들은 동물 종 또는 전체 생태계에 내재된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루엔은 그 역시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인간은 자연을 가치화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시야를 지닌 반면, 자연은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루엔은 종과 개체의 관계를 위계적이거나 단절된 범주가 아니라 상호 연결적인 것으로 본다. 반 두렌(Van Dooren)의 말을 빌리면 멸종이라는 사건의 복잡성은 시간과 미래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둘러싸고 더 심오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다. 즉 멸종이 야기하는 생태문화적인 영향은 인간이 미처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전개되며, 이때 개인-공동체의 차원마다 각각 상이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멸종 위기의 동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이 풀릴 수 있다. 그루엔은 생물학적이며 생태학적으로 개체 수가 드문 동물을 모두 똑같이 가치화하기는 불가능하며, 특정한 종들을 ‘멸종 위기종’으로 일제히 규정한다면 종 보호를 위한 감금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인간은 드문 종의 동물이 아니라 특이한(unusual) 종의 동물을 가치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을 위한 도구로서의 개체를 상정하는 대신, 또는 ‘전체 생태계’라는 전체주의적인 범주에 특정한 종을 희생시키는 대신 인간은 야생동물이 지닌 맥락에서 거리를 두고 그들을 ‘평가’할 수 있다. ‘드문 것’이 아니라 ‘특이한 것’에 주목하는 관점은 개체 수의 지형도가 아니라 (생물)진화론적‧사회적‧역사적‧생태학적인 맥락 속에서 다른 종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로써 인간은 타종의 인격적 삶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서, 그들이 지닌 특성을 인지하고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게 된다고 그루엔은 주장한다.


‘특이한 것’에 대한 강조는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도록 하는 요구로도 읽힌다. 우리는 전지적 주체가 상공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종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브루노 라투르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근대 과학이 규정한 ‘자연’의 관념을 깨어 나가야 한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서 라투르는 지구와 자연을 객체로 취급하는 근대인의 ‘행성적 관점’과, 신기후체제의 위기를 인지한 생태주의자(대지주의자)가 지녀야 할 ‘대지적 관점’을 대비시킨다. “행성적 관점은 사물을 ‘공중에서’ 보는 것인데, 이 관점은 항상 변해 왔고 … 신기후체제를 중요하지 않은 요동 정도로 간주할 수 있다.” 반면 “대지적 관점은 이런 종류의 거리감을 허용하지 않는다.”(라투르 2021: 106) ‘대지상의 모든 것들’이 야기하는 열기는 대지에 밀착한 상태로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1). 


앞서 언급한 가치화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과 야생동물이 마주침으로써 발생하는 갈등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각자의 이해관계(interests)를 따지는 과정이 선행하겠지만, 그루엔은 이해관계의 지표가 인간중심적으로 세워질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면서 갈등(그리고 이해관계) 자체를 보다 지속 가능하며 평등한 관점에서 다시 짜 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키기 위한 대안 관광, 에코투어리즘 역시 나름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인간-동물 간의 불평등한 구도를 깨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그루엔은 이보다는 야생동물이 인간의 존재와 접근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우며 침범당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보호구역(preserves)이 보다 대안적이라 본다. 대규모의 보호구역은 물론, 수용력이 비교적 낮은 보호구역도 ‘녹색 복도’(green corridors)를 설치하는 등 야생동물의 이동을 가능케 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를 적잖은 성과로 평가하면서도 저자는 고립된 공간인 보호구역이 야생동물에게 장기간의 생존을 보장하기에는 어렵다고도 덧붙인다.


다음으로 그루엔은 인간과 야생동물이 아닌 동물과 동물 간의 갈등에도 주목한다. 이는 이른바 ‘자연적인 갈등’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보다 전형적인 도덕적 행위자(more typical moral agent)로서, 인간인 우리가 동물들 간의 포식에서 발생하는 때로는 불필요한 고통과 죽임을 줄일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순진한 초식동물과 포악한 육식동물 사이에 도덕적 위계를 두어 양자를 대비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저자는 야생동물 간의 갈등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과연 윤리적인지,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 묻는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인간 아이를 사냥하는 사자를 막는 것이 윤리적이라면 가젤을 사냥하는 사자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인가? 공리주의자라면 야생동물(사자)을 (고통 없이) 죽여 전체적인 고통을 최소화시키자 하겠지만, 그루엔은 야생동물의 삶을 고통 또는 행복의 총량으로 단편적으로 환산하는 관점에 회의적이다. 더불어 저자는 ‘포식’ 행위가 지닐 수 있는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생동물의 권리를 침범하는 인간의 위협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금지되어야 하지만, 삶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야생동물의 사냥은 그와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 아이-사자’와 ‘가젤-사자’의 쫓기는 관계를 견주는 질문은 보다 복잡하다. 우리에게 총이 있다면 어린이와 가젤을 모두 구할 것인가? 한 쪽만 구할 것인가? 아니면 손 놓고 있을 것인가? 만약 둘 다 구한다면, 사자의 행위를 윤리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인간의 개입은 정당한가? 특히 야생동물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인간은 동물(종)들 간의 관계에 개입할 권한(또는 윤리적‧법적 의무)이 없다는 주장(Gary Francione), 혹시 모를 부정의를 무릅쓰고서라도 삶을 번영시키지 못할 위기에 처한 생명체는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 경우에도 특정 생명체의 자연적 천성을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Jennifer Everett), 악어에게 공격 받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이 책의 2장 참고) 인간의 ‘윤리적’ 개입이 다른 동물종에 대한 자기중심적 시각을 반영할 수 있다고 보는 우려(Val Plumwood) 등이 그것이다. 이들과 달리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의견은 인간의 개입을 유일하게 지지하는 사례로 눈에 띈다. 누스바움은 인간이 야생과 자연에 항시 개입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 야생동물이 행할 수 있는 유희로서의 살해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루엔은 인간이 야생동물, 또는 감금된 동물 모두에게서 동물종 특유의 욕망이나 습성을 지울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부단히 영향을 끼쳐 온 인간과 야생동물의 관계가 (인간의) 윤리적 판단에 의해 말끔히 분리될 수도 없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은 전환된다. 야생동물의 삶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를 띠고 이루어져야 하는가?


인간은 야생동물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도움이 돌이킬 수 없는 폐해로 돌아오기도 한다. 찰스 다윈의 연구로 유명한 갈라파고스 역시 그러한 비극의 무대가 되었다. 갈라파고스의 생태는 20세기 들어 외래종을 다수 수용하며 변화했는데, 특히 염소의 급속한 확산은 토착종을 위협할 지경에 다다랐다. 이에 당국은 염소를 박멸 대상으로 삼아 끔찍한 방식으로 죽이기에 이른다. 그루엔은 그 대량 학살의 잔혹성도 문제지만, 이와 같은 ‘박멸’ 정책이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특정 동물 종의 박멸은 다른 종의 개체수를 일시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지만 머지않아 늘어난 종을 다시 박멸해야 하는 상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착종과 외래종의 공존 가능성을 고려하는 덜 파괴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변화하는 생태계에서는 생물학과 윤리(동물권)를 양자택일할 수 없으며, 인간의 개입은 이 두 가지를 분리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인간의 개입은 자연과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많은 경우 악영향을 끼치거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한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염소 절멸보다 덜 파괴적인 방식으로 보이지만, 한때 뉴질랜드 정부가 토끼 개체수를 조절하고자 포식자인 담비를 들여온 사건도 그러한 결말에 이르렀다. 토끼 자체도 뉴질랜드에 들어온 유럽 이주민에 의해 예기치 않게 번성한 종이지만, 그들을 줄이기 위한 방침은 더 큰 악순환을 불러온 것이다. 그루엔은 기후이변으로 인한 멸종을 막기 위해 특정한 동물 종을 이주시키는 정책도 비슷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저자는 다른 동물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보다 겸손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에 대응하지 않기란 어렵지만, 그러한 행동이 이후 예상치 못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 라투르, 브뤼노(박범순 역), 2021,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이음.




참고문헌:

Lori Gruen, 2011, Ethics and Animal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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