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i Gruen, <Ethics and Animals> 5장
오늘날 도시에 살며 다양한 동물을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반려동물이나 도시의 생활에 적응한 동물들, 아직 위태롭게 보존되고 있는 녹지 공간을 터전 삼는 동물이 아니라면, 우리가 tv나 동물도감에서나 보던 동물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은 주로 동물원일 것이다. 평소에 쉽게 보지 못하는 동물들을 실제로 본다는 건 원초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경험이기에 특히 아이들이 매우 좋아한다. 내 기억 속에서도 동물원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놀러가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놀던 장소였다. 하지만 어린이의 눈에 동물원에서 본 동물들이 늘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모습, 앞뒤로 같은 걸음을 반복하며 불안해보이던 모습, 좁은 공간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 등 텔레비전 화면 속 너른 들판에서 활기차게 뛰어놀던 총기 가득한 눈빛은 그 안의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생태에 걸 맞는 곳에서 마음껏 살아야 하는 동물들을 가둬놓은 대형 감옥이 동물원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미치자 동물원은 더 이상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번 장에서 저자는 동물들이 감금되어 있는 여러 상황들을 짚어가며 윤리적 쟁점들을 던진다. 이미 감금된 채 생활하는 동물들의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생기는 딜레마들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비인간동물들을 통제하고 감금하여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건 옳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로 동물들을 가두고 있는 동물원이나 생추어리(sanctuary), 또는 반려동물로서 가정에서 함께 사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동물들을 놓아준다면 갇혀 살 때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노출되어 더 빨리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동물을 가두었을 때, 그들은 어떤 피해를 입는가? 가둠으로서 박탈되는 자유가 동물에게 유의미한가? 동물에게 존엄성이 있다면, 이것을 우리가 침해하는 건 아닌가? 저자는 이 질문들이 동물의 감금에 대한 딜레마를 해소하는 데 핵심적이라 말한다.
오늘날 동물들이 갇혀 사는 장소는 동물원, 가정, 그리고 생츄어리로 추려볼 수 있다. 동물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장소는 동물들에게 좋은 곳일 수가 없다.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동물들을 유흥수단 삼아 만들어진 것이 동물원이 생기고, 오늘날에도 존속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동물의 생태를 고려한, 동물들의 복지를 염두에 둔 보다 친동물적인 동물원도 많아졌다고 하나, 과거 동물원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곳이었다. 좁은 공간에 동물들을 가두는 것은 예사였고, 음식도 각각의 식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빵이나 포도주, 죽을 먹였다니 말이다. 당연히 동물원의 동물들은 이상 징후를 보이거나 얼마 못 살고 죽어나갔다. 동물의 복지를 고려했다는 동물원들에서는 동물원이 더 이상 유흥에만 집중하는 기관이 아니라, 종의 보존과 연구 및 대중교육에 기여한다고 순기능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원에서 이뤄지는 연구가 종의 보존에 기여한 측면은 찾아볼 수 없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연구란 감금된 동물의 행동에 국한되어 있다. 더군다나 대중교육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동물원에서 전하는 메세지가 유해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이 관찰자가 되어 비인간동물을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관찰하는 일 그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태도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한편 동물원에서는 종을 관리한다면서 유전자 확보 기준에 따라 멀쩡한 동물을 죽이기도 하는데, 덴마크의 한 동물원에서는 2014년에 해당 기린의 유전자가 이미 다른 개체를 통해 충분히 발현되었다는 이유로 총살하고 그 사체를 공개적으로 토막 내어 같은 동물원의 사자에게 먹이기도 했다. 각 개체가 고유한 생명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종의 특정 유전자 조합의 표본으로 존재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동물원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앞으로도 존속을 주장한다면 거센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만일 동물들의 생활환경이 극적으로 개선되어 개체들이 자유롭게 번식을 하고 자연에서와 유사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면, 동물들을 가두는 일은 정당할까? 저자의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개념은 삶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제 아무리 좋은 삶을 이루는 조건들을 갖춰준다고 해도 자유를 박탈한, 다른 존재의 통제 하에 살아야 한다면, 인권의 심각한 위배로 여겨질 것이다. 동물의 감금에 대해 논란이 생기는 것은 동물들도 ‘자유’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해당 개념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이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적인 논리가 깔려 있는데, 동물들에게도 어떤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이 있음을 들어 그들 또한 자율성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지능력의 여부와 자유 추구의 다소 빈약한 연결성에 머물기 보다는 자율성 자체를 새로 접근해보기를 저자는 제안한다.
아무리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었더라도 감금 자체를 비판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비인간 동물의 존엄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존의 칸트적 존엄성, 정치적 존엄성, 동물 존엄성 개념들을 짚어본 뒤 마지막으로 ‘야생의 존엄성(wild dignity)’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앞의 개념들 가운데 칸트적 존엄성과 동물 존엄성은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고정된 무언가로부터 존엄성이 비롯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데, 존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극되고 행동으로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나치게 고정적이다. 저자가 지지하는 ‘야생의 존엄성’이란 정치적 존엄성과 유사하게 관계 중심적이고 역동적이다. 이는 David Luban(2009)이 제시한 인권에 대한 설명과도 유사하다1). 우리가 비인간 동물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봤을 때 더욱 두드러지는데, 인간 사회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강요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야생의 존엄성’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의 경우에는 어떨까? 그들에게 안정적인 거주지와 사랑을 제공해준다는 것만으로 인간과의 동반생활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비인간 동물이 인간과 함께 생활하면 인간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인간의 생활방식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돌봄을 제공하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그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점이 반려동물 반대자들의 비판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관계에서도 늘 힘의 역동이 있으며, 반려동물과의 생활 속에서 인간이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인격적으로 성숙하며, 반려동물 또한 인간과의 관계를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반박한다. 인간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반려동물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미래에는 그 윤리적 의미를 따져봐야겠지만, 그 때까지는 함께 생활하며 최선의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츄어리 또한 비인간동물의 자유를 박탈하고 존엄성을 침해한다는 면에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감금되어 있다가 구조된 동물들이 최소한의 통제 하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생츄어리는 중간지대로서 우리에게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비인간동물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인간관계의 연장선에 두면서 그 이후의 보다 나은 상황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풀어준다고 해서 행복한 삶을 보장해줄 수 없는 비인간동물에게 최선의 환경을 제공토록 해야 할 것이며, 그들을 유흥거리로 삼는 모든 행위는 중단해야 한다. 또 그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아 그들의 서식지와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이들에 대한 추가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1) “human dignity is not a metaphysical property of individual human beings, but rather a property of relations between human beings - between, so to speak, the dignifier and the dignified."
참고문헌:
Lori Gruen, 2011, Ethics and Animal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