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사실, 미움받기 싫은 나의 간절함이었다.

by 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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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인들과 모여 앉아 웃고 떠드는 저녁,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한 온도의 위로를 건넨다. “그랬구나, 정말 속상했겠다.” 누가 봐도 사려 깊고 다정한 사람의 전형이다.


하지만 사실 내 마음 한구석은 팽팽한 긴장 상태다. 내 안의 레이더는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상대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게 될까?’


사실 나는 관계 안에서 유독 ‘적당히 유능하고 무난한 나’로 머물려 애쓰는 편이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나는 빛의 속도로 내 전공 분야인 ‘상담사’라는 방패를 꺼내 든다.


“나 사실 지금 좀 짜증 나”라고 말하는 대신, 슬쩍 세련된 조언을 섞어 상황을 부드럽게 넘겨버리는 식이다. 그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가 마주하게 될 그 서먹한 공기가,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설 차가운 시선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안의 결핍이나 찌질함이 들통날 것 같아 조바심이 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더 열심히 잘난 체를 한다. 묻지도 않은 전문 지식을 늘어놓거나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은근히 성취를 나열하며, 내가 여전히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시키려 애쓴다.


남들이 보기엔 여유 있는 상담사의 모습이겠지만, 정작 그 안의 나는 비겁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내 민낯을 보여주기보다 능숙한 가면을 쓰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관계의 평화를 수호하고 돌아오는 길은 늘 찝찝하다. 진짜 내 마음은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채, 오늘도 근사한 연극 한 편을 끝낸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서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리는 이유는, 관계 자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미움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배역’을 소화하느라 기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내 방에 놀러 온 친구가 빨리 가길 바랐으면서도 못된 아이가 되기 싫어 더 환하게 웃어주던 그 찔찔했던 아이는, 커서 ‘다정한 상담사’라는 아주 그럴싸한 성벽을 쌓았다.


하지만 이번 주제를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내 친절의 정체를 본다. 나의 다정함은 상대를 향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를 지키고 싶어 높이 쌓아 올린 세련된 방어선이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 내 선 안으로 훅 들어오는 것이 두렵다. 이 글을 발행하고 나서 반응을 살피지 못하는 것도, 혹시나 “당신 생각보다 별로네”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무서워서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하려 한다. 나는 결함 투성이고, 가끔은 잘난 체하며 숨고 싶어 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관계 안에서 나는 늘 미움받지 않기 위해 도망칠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아주 조금씩 셔터를 올리고 그 틈으로 들어오는 불편한 공기를 견뎌보려 한다.


완벽한 사람으로 남기보다, 조금 서툴고 찌질한 모습이 들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남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잘난 체하며 숨어버리는 내가 가끔 얄미워지더라도, 그 마음 밑바닥엔 그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작은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오늘은 그 아이를 미워하지 않고, 고생했다고 가만히 토닥여주고 싶다. 미움받을 용기까지는 아직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질 용기를 내본 것만으로도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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