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오지 속에서
“수학과 영어를 전공한 현장관리인?”
나는 대학에서 수학과 영어를 전공했지만 온라인 서점에 입사하게 되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2년 동안 근무한 후에는 건축 현장 관리인으로 이직했다. 뜬금없는 행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고심해서 한 선택이었으니 후회나 의심은 없었다.
구두 대신 안전화를 신은 내게 앞으로 유토피아가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보통 멋진 산들은 굽이굽이 펼쳐져 있지 않은가. ‘산 넘어 산’. 건축 쪽으로 이직 후에는 더 굴곡진 시간들을 보냈다. 첫 번째 회사에서 6개월. 일주일에 하루 쉬었고, 연차도 없었다. 야근은 일상이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8개월. 서울 노른자 땅에 단독주택 1채를 짓고 퇴사했다. 세 번째 회사에서 3개월. 회사 휴업으로 인해 실직했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실직이었다.
실직자가 되었다.
실직 후, 국가로부터 격려금을 받게 되었다. 실업급여. 내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나의 역량을 키워 좋은 근무조건의 회사로 가든지, 아니면 또 어렵게 선택한 이 업계를 떠나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걸까. 역량을 키워 적성에 맞는 건축 일을 오래 해보기로 결심했다. 첫 스텝은 건축 자격증 공부와 공무원 시험공부였다. 지루해 보이는 공무원은 누가 시켜준다 해도 안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호기로웠던 ‘과거의 나’, 그리고 국가의 격려금으로 하루를 간간히 살아가며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는 ‘오늘의 나’. 인생은 요지경이고 사람은 변한다. 불합격할지도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해야 한다. 불안함을 동력 삼아 공부해야 한다. 이 험난한 오지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Connecting the dots.
가끔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상상들을 해본다. 만약 대학시절 경제적으로 넉넉했다면 승무원 도전을 지속했을까? 만약 온라인 서점을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덜 불안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되돌아갈 수도 없고 시간을 앞서 살아갈 수도 없다.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우리의 말로 존재하는 ‘만약’이라는 단어는 실패라는 상상 속 부정적인 생각을 강화할 뿐이다. 만약이라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것을 되돌리는 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항공승무원 준비를 하며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놓은 덕에 영어 과락 걱정 없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고, 온라인 서점에서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갖고 건축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온라인 서점에서 일할 때 옆자리에서 함께 일했던 대리님과 함께 살고 있다. 평생의 반려자를 찾았다. 실패는 시간 속에서 해석될 뿐이다.
한 때, 나는 오지탐험가를 꿈꾸었다. 그땐 몰랐다. 삶 자체가 오지라는 걸. 삶을 산다는 게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만큼이나 힘겹고 숭고한 일이라는 걸. 어쩌면 내가 실패라고 여겼던 과거의 많은 일들은 내가 향하고 있는 인생의 수많은 여정표가 아니던가. 비로소 나는 이 여정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