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대하는 한국의 현주소
얼마 전, 우리는 자연인 문재인이 아닌 대통령 문재인의 화환이 성범죄자 모친의 장례식에 전달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까지. 우리는 그때 바로잡았어야 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 가해자로 기소된 박원순 시장의 장례를 국가 세금으로 5일장이 치러졌다. 그리고 망자를 미화시키는 기사,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며 증거를 대라는 수많은 댓글들. 이게 바로 성폭력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철저한 가해자 중심주의.
박원순은 성희롱으로 최초 법적 판결을 이끌어낸 변호사였다. 성희롱이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성희롱의 과정, 법적 개념과 판결 요소 또한 깊게,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성추행으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기소권도 사라져 버렸다. 수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의도했던 거라면 영악하고 파렴치한 양심 없는, 기만적인 ‘죽음’이고, 만약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진상을 규명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또한, 결과적으로 2차 가해도 벌어지고 있다. 이 것이 그의 죽음이 남긴 현실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명이 존엄하기 때문인가.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죽음에 애도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보통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다. 우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죽임’에 익숙하다. 우리는 그때마다 약자의 고통과 죽음에 애도했고 분노했다. 그 죽음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했고 연대했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우리는 새로운 죽음의 양상을 목도하고 있다. 스스로 ‘죽음’으로써 결론적으로는 2차 가해가 시작되었고, 진실마저 가려질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망자가 생에 그토록 외쳤던 인권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인권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망자와 유족의 인권을 외치고 있다. 지금, 누가 약자인가. 누가 누구의 인권을 외치고 있는 건가. 왜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약자의 인권을 외쳤던 것인가. 그리고 왜 또 약자가 아닌 권력자의 인권을 외치고 있는가. 권력자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를 바라보며 권력의 위력을 실감한다. 애도를 통해 생전의 권력은 권력자가 죽은 후에도 겹겹이 두터워진다. 참으로 무섭다. 죽어서도 발휘하는 권력 말이다. 우리는 권력자를 향한 애도가 숨겨진 진실을 은폐하는 벽들을 쌓는 행위라는 걸 진정 모르는 걸까. 망자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칼럼을 첨부한다. 명쾌하고 속이 시원해지는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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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 다 할 수 있다. 애도를 외치는 이들이 피해자의 연대도 함께할 것이라는 말처럼, 피해자와의 연대를 외치는 이들도 충분히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애도는 개인 차원에서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SNS와 같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공적 영역에서의 ‘애도’는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유명 정치인을 비롯한 공인들의 조문 행렬도 마찬가지다. 공적으로 애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위압감은 더해지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살아있을 때에도, 가해자가 사망한 이 시점에도, 권력의 위력을 느낄 것이다.
피해자의 3년의 고통의 시간, 아니 앞으로도 지속될지 모르는 고통의 시간들. 생명이 지닌 존엄이라는 가치 때문일까.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정서는 이미 가해자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잠식된 분위기다. 생명 존엄의 가치와 성추행이라는 범죄, 이 둘을 단순히 저울질하는 것 같아 보이는 현 세태가 한탄스럽다. 같은 맥락에서 '공'과 '과'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살아있고 피해자의 고통이 지속되는 현 시국에서는 공은 개인 차원에서, 과는 공적 차원에서 논해야 하지 않을까? SNS는 일기장이 아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공적 차원의 애도의 물결이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애도 후에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묘하게도 3년 전, 그 날이 떠오른다. '나중에, 나중에!'. 연대는 나중에.
왜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곁이 아닌, 가해자의 곁에 있는 걸까? 이상하지 않은가. 가해자의 감정에 이입할 정도면, 피해자의 감정이입은 더 쉽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 서울시장의 죽음에 더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면식 없는 ‘익명의 피해자의 호소’보다는 익히 알고 있는 ‘서울시장의 죽음’에 우리의 마음은 동요되었기 때문인가.
이 죽음이 결코 작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정치인의 죽음으로 미화되서는 안 된다. 인권변호사의 인생에 작은 오점으로만 치부되어서도 안된다. 망자의 '침묵'과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며 기다려보자는 넷상 온갖 신들의 '방관'으로 더 이상 살아있는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존엄'을 위해서라면 살아남은 피해자의 SOS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진실의 왜곡과 추측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이 일상과 안전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_피해자의 입장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