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 Feb 10. 2021

보고서에 날씨를 기록하는 이유

건축 현장에서 공사일보 작성

"보고!"


첫 '보고'는 군대 훈련소에서 배웠다. 분대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총원 O명, 결원 O명, 현재 인원 O명' 이런 식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행이다. (군대 이야기를 글로 써서 정말 미안하다.) 군생활 내내 일일보고 주간업무보고와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제대 후에도 양식을 갖춘 보고서를 가끔 작성하곤 했다. 대외활동을 간간히 했었는데 활동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회사에 입사를 했다. 회사 생활은 보고의 연속이었다. 회사는 학교나 군대처럼 일거수일투족 감시되는 체계가 아니다. 일주일간 했던 일들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보고하고 주로 숫자로 보고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단 몇 자로 나의 일주일이 압축된다는 사실에 굉장히 허탈하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팀원들에 비해 보고서에 적힌 숫자가 낮다는 사실, 다른 팀원들에 비해 조리 있게 보고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열등감을 증폭시켰다. 보고서를 잘 쓰는 것도 일을 잘하는 지표 중 하나였다. 열만큼 일한 것을 열하나로 보이게끔, 열만큼 일한 것을 다섯으로 보이게끔 하는 비법은 얼마나 보고서를 잘 쓰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보고서 작성은 일종의 마법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보고서 작성은 일종의 마법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 unsplash


사무실에서 3년 가까이를 일하고서 건축 현장으로 이직했다. 보고서 작성하는 일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보고서를 쓰더라도 사무직 할 때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단 명칭부터가 달랐다. 사무직에서는 '주간업무보고', 건축현장에서는 '공사일보'. 양 자체가 달랐다. 사무직 때에는 주 1회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현장에서는 '매일' 보고서를 작성했다.

(각 회사별로 다르겠지만 대체로 건축/인테리어 현장에서는 1일 1보고를 원칙으로 한다.)


공사일보 작성하기: A면

내가 근무했던 회사에서의 공사일보는 공사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A면과 세부적인 공사 내용과 사진을 정리한 B면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A면을 살펴보자.



첫째, 공사일보에는 출력인원을 적는다. 출력인원은 현장에서 '데스라'라고 하는데 공종별로 작업자의 인원을 뜻한다. 일종의 인원체크다. 어쩌면 회사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항목일지도 모른다. 돈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각 업체들이 제출한 출력인원과 비교하기 위해 출력인원은 매일 업데이트한다.


둘째, 공사일보 A면에는 날씨를 꼭 기재한다. 난 날씨를 기록하는 게 굉장히 신기했다. 내가 경험했던 사무직에서는 대부분 실내에서 컴퓨터 작업을 했고 보고 내용은 날씨와 무관한 편이었다. 하지만 건축현장은 달랐다. 기상상황에 따라 자재 조달과 실외 공사 일정이 변경되었다. 예를 들면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부는 날에는 공사 자재를 들여오거나 외부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날씨를 보고서에 기록해두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


셋째, 당일과 내일 예정 공사내용을 적는다. 공사 내용은 업무 내용을 적는 것이기 때문에 사무직에서 업무 보고를 작성하는 양식과 내용이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넷째, 안전교육 현황을 적는다. T.B.M. 시간에 안전 관련 전달사항을 기록한다.

1. 작업 후 현장 정리정돈 실시.
2. 고소 작업 시 안전벨트 착용.
3. 현장 내 금연, 외부 흡연구역 이용.
4. 외벽 패널 작업이 있을 예정이니 건물 출입 시 주의.

해당 날짜에 진행되는 공사에 따라 안전교육 내용이 달라졌다. 안전관리 차원에서 보고서에서도 작성했다.

* TBM: 건설현장 아침 조회 시간


공사일보 작성하기: B면(사진대장)

나는 공사일보를 작성하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을 투여했다. 특히 B면 사진대장을 작성하며 애를 먹었다. 단순히 사진을 찍어서 폴더에 보관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폴더에는 층별로 사진을 분류해서 정리했고 사진대장에는 주요 사진과 함께 층별, 공사 종류별로 공사 내용을 간단히 적어야 했다.



사진대장을 작성하려면 일단 사진을 촬영하고 휴대폰의 사진을 카톡이나 이메일을 통해 컴퓨터로 옮긴다. 사진에 맞게 각각 해당되는 공사내용을 기록한다. 사진대장 작성 때문에 입사 후 한 달 정도는 공사일보 작성하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있어서 저녁에 불을 켜고 다시 현장에 가서 살펴보면서 사진을 찍고 현장사무실로 돌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빠뜨린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 현장에 한번 다녀오면 30분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현장사무실은 지하 2층 주차장에 있었고 현장은 지하 5층부터 지상 12층까지였기 때문이다. 미리 생각해두고 찍으면 되는 걸 왜 바보같이 두 번씩 일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공종과 층별 공사내용을 머릿속에 기억해뒀다가 사진을 그때그때 찍는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현장은 지하 5층, 지상 12층이었으니까 총 17층의 공사 내용을 기억했어야 했다. (물론 내가 정말 바보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공종: 공사 종류


모든 공사 내용을 사진대장에 넣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주요 공사 내용과 사진을 빠뜨리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선배에게 꾸중을 듣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빠뜨리지 않고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퇴근 시간은 빨라야 8시,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날 공사를 위해 현장을 정리하고 퇴근하면 10시였다. 소장님은 일찍 일찍 퇴근하라고 하셨지만 일의 양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간혹 회식이 있는 날이면 자정을 넘겨 퇴근하곤 했다. 다음날 7시에 어떻게 출근했었는지 모르겠다.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탈진하는 날에는 공사일보를 쓰기 싫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공사일보를 쓰는 게 재밌었다. 공사일보를 작성하면서 건축 시공 기술에 대한 지적 욕구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기분이었다.


보고서를 통해 일의 디테일을 배웠습니다.

보고서는 단순히 보고하는 문서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공사일보를 쓰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보고를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어떤 공사인지 어느 부분이 공사가 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왜냐하면 공사내용은 '1층 천장 공사'와 같이 간단하게 적지 않기 때문이다. '1층 창고 천장 1차 퍼티 작업'과 같이 세부적인 공사 내용을 적어야 했다. 세부적인 공사 내용을 아는 일은 좋은 현장관리인이 갖춰야 하는 기본 역량이기도 하다.


훌륭한 현장관리인은 숲과 나무를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철거, 목공, 방수, 조적, 미장, 도장 등 이런 공종의 순서를 익히는 건 건축 공정에서 숲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역량 있는 현장관리인은 각 과정 사이사이를 채워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숲에 어떤 종류의 나무들이 있고 그 나무들이 어떻게 공생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면, 철거와 목공 사이에 어떤 세부적인 일이 있는지 철거는 어느 정도의 면적을 해야 목공이나 조적 작업자들이 작업하기가 편한지 꿰고 있어야 한다. 도장(페인트칠) 작업도 마찬가지다. '샌딩>퍼티>샌딩>2차 퍼티>프라이머>1차 도장>마무리 도장' 순인데 총며칠의 시간이 걸리고 바쁘다면 어떤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지 알고 있어야 현장에서 대응할 수 있다.


좋은 현장관리인은 보고서를 얼마나 세밀하게 쓸 수 있는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모르면 적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건 그만큼 배울 게 많다는 뜻이다. 나는 배울 게 많은 늦깎이 신입 현장기사였다. 나를 붙들고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이는 없었다. 선배들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빠 허덕였다. 지하 5층에서 지상 12층까지 현장소장 1명, 대리 1명, 현장기사 2명이 맡아서 했으니 후배를 챙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일단 현장에서 궁금한 게 생기면 메모장에 바로 메모를 해두었다. 그 후 일차적으로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검색으로 해결이 안 되면 눈치껏 사수나 작업반장에게 여쭤봤다. 그렇게 건축 현장을 눈으로 익히고 건축 기술과 정보를 머리에 축적시켰다.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면 피곤해진다. 보고를 하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재미'를 찾거나 자기 능력을 PR하는 용도로 보고서를 작성하면 조금은 즐거운 보고서 작성이 될지도 모르겠다.


슬기로운 보고 생활은 중요하다. 왜냐고? 어느 조직이든 단체에 속하게 되면 보고 없는 삶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 경험을 토대로 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쓰레기도 돈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