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 Jan 08. 2021

DDP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정석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리뷰

정석 교수 글을 처음 본 건 2020년 초반이었다. 몸 안에 누적된 현장 먼지도 빼낼 겸 일을 쉬던 시기였다. 정석 교수의 글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면서 씁쓸한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공간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지만 잘못하면 주변 이웃과 동물 그리고 이 지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 중 일부는 소소하게 집을 수리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수십억, 수백억을 넘나드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수많은 돈이 오가는 가운데 '약자'의 얼굴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건축폐기물의 양이 배출되었다. 또한 몇 단계인지 분석해야 할 정도의 하도급 구조에 입이 떡 벌어졌다. 피라미드 구조에 상위 계층에 있는 이들의 젠틀한 몇 마디로 실무자들은 바삐 움직였다. 촘촘하게 조직된 착취의 구조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대규모 건설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집약체 같았다. '공공성을 띠는 건축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정석 교수 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도시재생과 마을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 책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를 읽게 되었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는 부제처럼 '정석 교수의 도시설계 이야기'다. 간단히 요약하면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발'보다는 옛것을 고수하고 '보존'하자는 도시재생적 관점의 도시설계 이야기다. 대학 강의실에서 하는 딱딱한 강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시민이라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도시 이야기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자연미가 살아 있는 도시가 참한 도시

역사와 기억이 남아 있는 도시가 참한 도시

차보다 사람을 섬기는 도시가 참한 도시

우리 손으로 만든 도시가 참한 도시

참한 도시 공부하기, 참한 시민 되기

저자가 여는 글에서 밝혔듯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지 않아도 된다. 읽고 싶은 꼭지부터 읽어도 되고 관심 있는 주제들만 골라서 읽어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 자연미가 살아 있는 도시

1부의 키워드는 자연과 환경이다. 저자가 서울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한강 변의 경관 문제를 크게 네 가지로 유형화했다.

첫째, '위압 경관'은 주변보다 덩치가 지나치게 크다. 인근에 햇볕을 가리고 사생활을 침해하는 등의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둘째, '차폐 경관'은 남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셋째, '잠식 경관'은 구릉지 지형과 녹지를 훼손한다. 마지막으로 서로 비슷비슷한 '획일 경관'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주변이나 도시경관에 심각한 피해를 주진 않는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도시들은 '튀는' 건축물이 있는 도시가 아니다. 비슷비슷한 건축물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풍경이 있는 도시다. 책에서 소개하는 체코의 프라하를 비롯해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도 그러한 도시들이다.


① 위압경관   ② 차폐경관   ③ 잠식경관   ④ 획일경관


2. 역사와 기억이 남아 있는 도시가 참한 도시

2부의 키워드는 역사와 보존이다. 북촌, 인사동, DDP, 한양도성을 사례로 사라질 뻔했던 가치를 보존한 사례와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DDP(동대문 디자인플라자)는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다. DDP는 완공 전부터 완공 후까지 독보적이고 특이한 디자인의 건축물로 이목을 끌었다. 완공 후 서울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외계인의 똥'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지만 말이다. 


당시 설계 공모에서 2위를 한 조성룡의 설계는 해당 대상지가 갖는 도시적 맥락을 가장 잘 반영했다. 쉽게 말해 대상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담았다는 뜻이다. 반면 현재의 DDP는 과거는 고려하지 않고 갈아엎어버린 '재개발'과 매우 닮아 있다. 그런데 만약 2위를 한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가 당선되었다면 동대문의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책에서도 동대문 토목 공사 당시 이간수문 발굴 현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그때를 떠올리며 '동대문 잔혹사'라 표현했다. 저자 외에도 이미 국내 많은 건축가들은 DDP를 비판했다. 과거는 돌이킬 수는 없다. 천문학적인 자본과 시간을 들여 완성된 일이다. 2021년은 DDP 완공 10주년 차다. 하지만 우리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DDP 건축으로 인해 서울시와 서울시민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이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성찰이 앞으로의 서울시의 모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좌: 자하 하디드 作 현재의 DDP / 우: 설계공모 2위 조성룡 作 DDP

3. 차보다 사람을 섬기는 도시가 참한 도시

2019년 6월 말 국토교통부 자동차관리정보시스템(VMIS)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동차 누적 등록대수는 2344만 4165대다. 인구 2.2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한 셈이다. 도시 이야기를 하며 자동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저자는 자동차와 관련한 제도를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도로법이나 도로교통법에 의하면 보행전용도로는 있어도 보행우선 도로의 개념은 없다. 서울의 덕수궁길을 비롯해 보행우선도로 또는 보차공존도로를 만든 예들은 있지만, 법 제도상 보행우선도로의 개념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중략)
문제는 사람과 차가 함께 쓰는 '보차혼용도로'다. 보도와 차도를 구분해놓지 않은 보차 혼용도로가 얼마나 많은가. 이 같은 보차혼용도로의 주인이 차가 아닌 사람을 명확히 하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한 곳이 바로 보행우선도로다. 보행우선도로의 개념이 없다 보니 사람과 차가 함께 사용하는 보차혼용도로에서 주인은 당연히 차다.
/p. 146

저자는 보행우선도로를 지정함으로써 도로에서 '사람이 먼저'임을 제도적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가끔은 사람들이 차를 기다려주거나 차가 거대한 몸집을 앞세워 사람이 비켜가길 강요하는 상황은 자주 벌어진다. 얼마 전에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대형버스가 빨리 지나가라는 식으로 가속해왔다. 운전 문화와 운전자의 에티켓과도 관련된 문제지만 자동차를 우선하는 제도적인 현실이 '몸집 큰 자동차가 먼저' 문화를 조장하고 있진 않은가?


1~3부는 시민을 위한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4~5부는 시민이 만드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4. 우리 손으로 만든 도시가 참한 도시

4부는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의 공공성, 그리고 마을 만들기와 마을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하며 서울시와 마을공동체 행정에 관해 소개한다.

도시설계는 도시계획과 건축의 한계에서 태어났다. 도시계획의 한계는 섬세함 또는 자상함의 부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설계 또는 디자인 마인드의 미흡함이다. 건축의 한계도 분명하다. 건축은 속성상 각각의 대지 안에 머무르니, 주변과의 관계나 조화보다는 자신의 요구나 이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건축의 한계를 요약한다면 도시 마인드 또는 공공 마인드의 부족이다.
/p. 219

내가 현장에서 느낀 건축의 한계를 콕 집어준 문장이었다. 소화제를 먹은 듯 체기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5. 참한 도시 공부하기, 참한 시민 되기

훌륭한 시장 혹은 탁월한 도시 전문가가 '참한 도시'를 만든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참한 도시는 참한 시민이 만든다. 시민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시민이 도시를 만들어가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마을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마을활동가의 힘보다는 구청장 혹은 시장의 힘이 도시에서는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 시장 한 번만 바뀌어도 도시의 모습이 휙휙, 팍팍 바뀌어버린다. 비록 그게 좋은 방향일지라도 민주적인 '도시'를 뜻하진 않는다. 주민이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은 매우 지난하고 힘겨운 일이다. 때론 희생이 필요하고 고통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희망은 마을과 시민에게 있다.


도시에 관심 있는 이들, 도시를 변화시키고 싶은 시민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책에 나오는 주요 사례는 서울시의 사례다. 서울시를 하나의 도시로서 이해하는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서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물론 도시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친절한 도시 개론서로 충분하다. 저자가 언급하는 도시학자의 책과 콘텐츠들을 메모해뒀다가 참고하는 것도 도시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공부 길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서울시 4.7 보선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를 읽고서 각 후보들이 서울시에 대해 어떤 공약을 펼치는지 분석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줄 것이다. 어떤 목적으로 이 책을 접하든, 책을 통해 꿈꾸는 도시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옮겨오는 발판이 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