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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Aug 12. 2020

가나안 교인의 주일성수

선데이 크리스천과 가나안 교인

* 개인 경험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한 달간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렀다. MBC 어학캠프 인솔교사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평일에는 캠프에 참여한 초등생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학습을 관리했다. 잠도 6인실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잤다. 24시간 학생들과 붙어있는 삶이었다. 주말에는 주로 야외활동을 진행했는데 나는 오전 시간을 활용해서 근처 현지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주일성수하기 위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어쩌면 지독한 신앙이었다. 내가 예배에 참석하면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내 몫까지 아이들을 케어해야 한다. 내가 정말 나쁜 놈이었던 건, 심지어 함께 일하는 선생님도 크리스천이었다. 교회 나갈 마음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 때문에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여간 나는 이 정도로 철저하게 주일성수하는 신앙인이었다. 맹목적인 신앙에 의문을 제기한 사건은 세월호 침몰 사건이었다. 침몰하는 배가 매스컴을 통해 보도가 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있었다. 이후로 가슴에 담아두었던 의문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담아두었던 의문들 중 하나가 주일성수다. 주일성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누군가에겐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누군가에겐 대담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주일성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로 했다. 주일성수는 어떻게 시작된 걸까? 성경에 나오는 전통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에는 주일성수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7일째 되는 날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너희나 너희 자녀들이나 너희 종이나 너희 가축이나
너희 가운데 사는 외국인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출 20:7)     

목사들은 안식일 전통으로부터 주일성수의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 구약의 안식일, 출애굽기의 7일째 되는 날은 오늘날의 토요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이후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례를 행했다. 예수는 일요일에 부활했고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에 모이기 시작했다.

안식일 다음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살펴보려고 갔다. (마 28:1)     


이쯤 되면 누구라도 안식일과 주일 예배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고 주닐은 쉬는 날 같지 않다. 목사들은 그 수수께끼 같은 연결고리를 풀어주는 설교를 종종 한다. 주제는 '참된 안식'이다. ‘안식은 개뿔!’이라는 말을 내뱉고 싶지만 한 때는 참된 안식을 믿었고 경험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안식’의 개념이 바뀐 걸까.


애초에 단어에서부터 안식일과 주일성수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안식일은 安息日, 평안하게 쉬는 날을 뜻하고 주일성수는 主日聖守, 주일을 성스럽게 지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안식일은 성도 관점의 단어, 주일성수는 신 관점의 단어다. 사실 어느 관점이냐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성도가 평안한 쉼을 갖는 건 결국 신의 뜻이기도 하고 성스럽게 주일을 지켜 신에게 예배하는 것이 결국엔 성도를 위한 일이라고, 양 쪽에서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원과 유래 그리고 전통이 어떠하든, 현대에 주일성수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껍데기로서만 존재하는 주일성수의 모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출석도장을 찍는 행위에 그치는 교인들이 많다. 부모의 요구로, 별생각 없이 늘 그래 왔기 때문에,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실익을 위하여,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부모의 요구에 응해 주일성수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아직도 부모에게서 떠나지 못한 젖먹이 아이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별생각 없이 주일성수하는 사람들은, 그냥 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업과 정치를 위한 실익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차라리 솔직하다.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이들에게는 처방해줄 수 있는 약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공포심과 두려움에 의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주일성수하지 않으면 벌 받는 사례’들을 설교에서 많이 들었기 때문일 테다. 이런 실제적인 설교 사례들은 우리의 사고와 의식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쨌든 다양한 형태로 출석도장을 찍는 교인들이 많다. 오죽하면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둘째, 간혹 신앙이 깊은 사장님들은 일요일 오전 1부 예배를 마치고서 주일날 영업을 한다. 안식일에는 쉬라고 했는데 말이다. 여러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근본주의자 목사들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안식일에 영업을 하는 매우 불결한 행위인데 말이다. 이 와중에 신실한 사장님들은 본인은 일하지 않고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들을 일하게 하고 본인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분들에게 외치고 싶다. 차라리 ‘주일은 쉽니다.’ 걸어두고 당신은 교회에서 안식하고 직원들은 집에서 안식하게 해 주세요.       

셋째, 주일성수를 철저히 지키지만 삶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있다.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누가 순결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 있지 않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이런 상황에도 침묵하는 교회와 목사들이다. 주일성수는 꼭 지켜야 한다고 외치면서 교인들의 형편없는 삶에 대해서는 방관한다.


주일성수와 함께 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회개기도와 헌금이다. 세 장단이 맞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다 용서하셔. 그러니까 주일엔 꼭 나와서 회개 기도하자. 회개의 의미로 너의 진심을 담아 헌금해야 해. 많을수록 진실한 거야, 알지? 없을수록 내는 헌금은 하나님이 귀하게 받으신다.” 일주일의 삶을 기도와 헌금으로 씻어낸다. 목사는 세신사가 된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단순하고 간편해진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늘 있던 일이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났다. 하지만 목사들은 면죄부 판매의 전통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니까.


결론은 돈이다. 주일성수가 유지되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교회도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1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게 지나치게 윤리의식을 요구하는 것일까. 교인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교회는 돈이 필요하다. 출석도장으로 죄를 용서받는 교인, 출석도장으로 돈 만원이라도 더 벌겠다는 교회. 죽이 맞는다. 그래서 오늘도 목사들은 강단에서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일성수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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