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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Feb 25. 2021

채식 2년 차, 하다 하다 이런 것도 만들어 먹습니다

손바닥만 한 토르티야에 그리는 나만의 세상

금요일 밤, TV에서 <나 혼자 산다>가 방영되고 있었다. 배우 김지훈이 출연했는데 에어 프라이어로 피자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자막 표현처럼 정말 '美친 비주얼'이었다. 식빵 가장자리에 치즈를 두르고 꿀과 계란을 푼다. 그리고 각종 채소를 올려놓고 다시 에어프라이어에서 빵을 굽는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꼭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산다> 김지훈 편 갈무리 ⓒ MBC

며칠이 지나 주말이 되었다. 주말이면 괜히 피곤하고 나른해진다. 몸이 찌뿌둥한 날에는 요리가 귀찮아진다. 피자가 먹고 싶어 피자를 주문했다. 우리 집은 파파존스 피자만 취급한다. 왜냐하면 내가 치즈를 안 먹기 때문이다. 파파존스에는 '가든 스페셜'이라는 메뉴가 있고 주문할 때 치즈를 빼 달라고 요청하면 비건 피자를 주문하여 먹을 수 있다.


피자에 치즈가 없으면 그게 피자냐고? 그러니까 말이다. 치즈 없는 피자는 볼품이 없다. 채소들이 툭툭 떨어지면서 피자의 품격도 함께 뚝뚝 떨어진다. 치즈가 없다 보니 피자 한판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다. 지난번에는 한판을 시켜서 아내가 한 조각, 내가 일곱 조각을 먹었다.


그런데 파파존스에서 치즈를 뺀 가든 스페셜 피자를  매번 시켜먹을 때마다 서운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옵션에서 치즈를 빼면 다른 채소를 좀 더 넣어주길 바랐는데 과한 바람이었나 보다. 먹을 때마다 빵 위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바르고 채소를 듬성듬성 넣은 피자가 2~3만 원이라는 사실에 매번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 혼자 산다>의 김지훈 편에 나온 피자가 생각났다. 집에 오븐도 있고 토마토 페이스트와 채소가 있으니 직접 해 먹어 보기로 했다. 치즈 대신 소이 마요를, 식빵 대신 토르티야(또띠야)를 사용했다. 채소는 피망과 양파, 버섯, 감자, 당근을 넣었다. 집에 있는 채소를 모조리 넣었다. 그리고 파인애플을 올려놓으면 하와이안 피자 느낌을 만들 수 있다.


채소는 먹기 좋은 크기와 모양대로 잘라 넣는다.


집에서 비건 피자 만드는 순서
1. 토르티야 위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고르게 발라준다. 덕지덕지 바르면 짜기 때문에 고르게 펴 발라야 한다.
2. 소이 마요를 듬성듬성 뿌려준다.
3. 채소는 먹기 좋은 모양으로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아준다.
4. 볶은 버섯, 양파, 감자, 당근을 토마토 페이스트 위에 올려놓는다.
5. 피망과 파인애플은 볶지 않고 생으로 올려놓는다.
6. 오븐을 사용하여 200℃ 온도로 10분~15분 간 데워준다.


요리에 재능도 없고 요리를 즐겨하지도 않았었는데 비건 지향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요리를 자주 하게 되었다. 밖에서 먹는 음식은 대부분 동물성 식품이 들어가고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도 짜고 자극적인 맛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파인애플이나 초록색 피망을 넣어주면 산뜻한 피자 느낌을 줄 수 있다.


피자라고 하기엔 뭔가 아마추어 티가 팍팍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만족스럽다. 요리를 하고 만든 음식을 먹는 그 시간들은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생각이나 문제가 끼어들 틈이 없다.


요리하는 과정이 즐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상상했던 맛을 실제로 구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매우 설레고 흥분되는 시간이다. 사람들에게 잘 팔릴만한 음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나 하나는 만족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맛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예상한 대로 음식 맛이 구현되면 어렸을 적 어려운 수학 응용문제를 풀었을 때처럼 희열도 느껴진다. 만약 예상대로 맛이 구현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진 않는다. 여행지에서 계획에 없던 경험이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주방에서도 예상에 없던 맛은 유쾌한 기억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손바닥만 한 토르티야에 나만의 세상이 열린다. 예술가라도 된 기분이다. 토르티야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펴 바르고 그 위에 채소를 각자 위치에 얹어놓는다. 손바닥 만한 작은 공간이지만 온전한 나의 세상, 평화로운 세상이다. 그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어떤 동물도 해치지 않는 세상.


(플래닛타임즈에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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