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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Jul 06. 2021

어느 비건의 등산 일기

등산이란 취미는 이제 더 이상 아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캠핑과 등산이 주목받기 시작하더니 산 정상과 등산로에 젊은 세대가 모이고 있다. 등산이 힙한 문화가 되었다. 지금의 등산 문화를 보면 괜스레 흐뭇해진다.


지금은 포교활동이 부진하지만 한때 나는 등산 전도사였다. 10년 전쯤이었나. 당시 교회 찬양팀 리더였다. (절대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자존감이 매우 높은 편인데 유일한 콤플렉스가 있다면 목소리와 노래 실력이다.) 교회 찬양 팀원들을 데리고 산에 갔다. 그것도 한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 덕유산. 그 시절 고압적인 나의 태도 때문인지, 팀원들이 등산을 좋아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같이 별 탈 없이 산에 다녀왔다. 교회에서 시키는 전도는 안 하고 교회에서 등산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또래들은 산을 대부분 싫어했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했다. 내 뇌피셜이지만 아마도 이유는 강제로 산에 오른 경험이 많았기 때문일 테다. 내 또래들은 산을 즐기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웠던 경험보다는 억지로 산을 타야 하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우리 또래들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종종 현장체험 학습을 산으로 가거나 특별활동을 산으로 갔으니까. 돌이켜보면 학교 교육이 정말 '산'으로 갔다. 그런데 산에 갔던 기억이 그리 나쁘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종종 산에 다녔다. 한때 수염을 덥수룩 기르고 히말라야를 등정하는 '어드벤처 Lee'가 되는 게 꿈일 정도였고 주변 친구들로부터 산악인이라는 과분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친구들이 산을 싫어하다 보니 나는 늘 외롭게 산에 다녔다. 가끔 산을 같이 가주던 전여자친구들은 모두 떠나갔다. (산 때문은 아니겠지? 고마워 인영아) 청승맞아보일지 모르겠지만 산에서의 고독에 심취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 외로움이 도움닫기가 되어 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도 하고 산행을 함께 하기도 했다. 지금 가끔 터지는 오지랖은 산에서 터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등산에 가서 무엇에 취하는가

등산로에 가까워질수록 취한 사람 일색이다. 등산로 입구에는 등산용품을 파는 매장과 등산하기 전이나 후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줄지어 있다. 사람들의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등산의 최고 난코스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코스를 잘 견디고 산에 오르면 경치에 취할 수 있지만 각양각색의 화려한 등산용품에 취하는 사람도 있고, 산에 오르기도 전에 소주 한나발 불고서 꿈나라로 떠나는 사람도 보인다. 예전에는 산에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경치에 취하기 위해 온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산의 경치와 기록에 취해 산에 다녔던 것 같다. 산에 다녀온 후 추억을 남겨두기 위해 블로그에 기록하기도 하고 찍은 사진들을 SNS를 통해 공유했다. 그 무렵 급격히 친해진 친구가 있다. 바로 나의 서울메이트(seoul amte), 명훈이다. 나는 명훈에게 은근슬쩍 산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나누고 산에 함께 가자는 무언의 초대장을 수시로 보내기 시작했다. 화장품 샘플을 주며 홍보하는 것처럼.


어쩌다 우리는 2015년 겨울 무등산에 함께 오르기로 했다. 다행히 무등산은 겨울 설산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냈고 서울메이트 명훈은 그 이후로 트레킹 메이트가 되었다. 이후 우리는 산에 갈 때마다 함께 갔고 2020년에는 서울시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산을 다녀왔다. 함께 산을 다니며 우리는 <히말라야> 영화 포스터를 패러디한 무말라야(무등산), 소말라야(소백산), 지말라야(지리산) 작품과 공중부양과 날아차기 작품을 남겼다.



살아있는 생태교육 현장, 산

산은 살아있는 생태교육 현장이다. 사람도 사계절 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 산도 계절별로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봄과 여름에는 새소리와 나뭇잎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내 귀를 황홀하게 했고 푸르게 돋아나는 잎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 샘솟았다. 가을에는 바스슥 부스러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았다. 내면 깊은 무언가를 깨우기도 했고 우울감과 슬픔들을 표출하도록 돕기도 했다. 겨울에는 눈 쌓인 등산로를 걷는 게 좋았다. 눈을 밟으면 뽀드득 소리가 난다. 발로 밟는 촉감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귀르가즘'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정상에 오르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순백의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다. 그 어떤 계절보다 겨울에 산행하는 걸 좋다. 앞서 말했듯 명훈도 이 풍경에 반해 나의 등산 메이트가 되었다.



산에 가면 다양한 비인간동물을 만나기도 한다. 검단산에 갔을 때에는 겨울잠을 자러 가는 뱀을 보기도 했고 지리산과 예봉산에서는 손바닥에 놓인 먹이를 받아먹는 동고비를 만나기도 했다. 북한산과 관악산에서는 산 중턱과 정상에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보기도 했다. 살아있는 동식물을 통해 내 안에 생명성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채식인의 슬기로운 등산 생활

금강산도 식후경. 아무리 풍경이 좋고 감정이 충만해지더라도 먹고 마시는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다.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산행시간이 길어지면 산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채식하기 이전 주메뉴는 동물성 식품이었다. 참치캔, 냉동삼겹살, 3분카레, 3분짜장 등. 산을 오르며 중간중간 먹는 초코바 맛은 도심지에서 먹던 맛이랑 다르다. 똑같은 초코바인데 말이다. 정상에서 먹는 사과 한 조각, 포도 한 송이처럼 달콤하고 청량한 게 없다.



채식 이후에는 초코바도 못 먹고 대피소에서 먹던 삼겹살도 먹지 못한다. 겨울 산행에서 오들오들 떨며 입김을 휘이 불면서 마셨던 달짝지근한 인스턴트 믹스커피도 마시지 못한다. 아니 이제 먹지, 마시지 '않'는다. 채식을 시작한 이후 사회는 나에게 부지런함을 요구했다. 어딜 가더라도 굶지 않으려면 채식이 가능한 식당을 미리 탐색해둬야 했다. 아니면 매일 도시락을 싸야 했다. 등산을 취미로 하는 채식인은 더욱 고충이 심하다. 대부분의 식당이 비도심지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전날 도시락을 싼다. 감자나 고구마를 쪄두거나 과일채소버무림 만들어 도시락을 싸 둔다. 산 주변에 김밥집이 없을 걸 대비해 김밥을 미리 구매해두기도 한다. 김밥은 보통 선주문 후조리 시스템이기 때문에 햄, 계란, 맛살, 참치 등을 빼고 다른 채소를 넣어달라고 하면 채식김밥이 완성된다.


산을 오를 때만 번거로운 게 아니다. 하산 이후에도 문제다. 채식 이전에는 하산 후에 삼겹살 구이와 함께 맥주 한잔을 걸쳤다. 지금은 두부김치나 버섯전골 메뉴가 있는 식당에 간다. 이런 메뉴가 있는 식당을 미리 찾아두는 것도 내가 산에 오르기 전에 하는 일이다. 미리 찾지 못하더라도 두부전골이나 버섯전골을 주문하면서 동물성 식품을 빼고 조리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번거로울 만도 한데 서울메이트 명훈은 군말이 없다. 나랑 만나는 날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고마운 서울메이트.



산은 인간사회의 모순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인간들은 회복과 치유, 쉼을 위해 산을 찾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동식물로부터 쉼을 얻는다. 과연 인간을 마주하는 동식물도 그럴까. 대부분의 산이 도시 외곽에 있다. 산으로 가는 길에는 목줄에 묶인 '시골개'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공기 좋고 푸른 자연환경에서 그들에게 허락한 공간은 목줄이 그리는 원의 넓이뿐이다. 묶여있는 시골 개들은 사람이 지나가면 필사적으로 짖는다. 공간을 공유해본 적이 없어서 그 좁은 영역마저 빼앗길까 봐 두렸웠던걸까. 산책은 하는 건지 놀이 시간은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목줄에 메인 모습만이 내 기억 속에 남는다.



예봉산 등산을 마친 후 내려오는 길에 무시무시한 현수막을 봤다. '토종닭 직접 잡아서 해드립니다.' 산에서 고양이와 동고비에게 간식을 주며 교감했던 인간은 하산 후에 직접 잡은 토종닭을 먹는다. 토종닭을 잡아주는 식당에서 목줄이 풀린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 약간의 경계심을 보였으나 사람이 익숙한 듯 짖거나 달려들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굉장히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산에 사는 동식물이 주는 쉼을 누리며 생태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유익을 누리면서 동시에 산아래에서 벌어지는 동물 학대와 착취라는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쓰지 않는 게 인간이다.

 

글을 쓰다 보니 산에 대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글이 산으로 간 건 아닌지...) 그런데 막상 산에 올라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며 먹고 마시다 보면 삶의 복잡한 문제들이 잊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산 자체가 복잡하게 꼬여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든 이 사회가 복잡하게 꼬여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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