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게 싫었던 내가 복싱장으로...
맞는 게 싫었다. 하긴 누가 맞는 걸 좋아하겠는가. 나는 태권도, 유도, 농구, 축구 등 나름 액티브한 운동들을 꾸준히 해왔지만 복싱장에만 발을 딛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열 대를 때리더라도 한 대 맞는 걸 그토록 싫어했으니까. 맞는 건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UFC나 복싱 경기가 있으면 챙겨보곤 했다. 내 안에 어딘가 자리 잡은 폭력성 때문일까.
사무직으로 일할 때 하루 평균 12시간가량 앉아 있다 보니 평소 소화가 잘 안되고 장도 안 좋았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집 근처에는 태권도장, 헬스장, 복싱장, 요가원이 있었다. 태권도장 프로그램은 주로 학생들에게 맞추었고 어렸을 때 태권도를 지겹게 한 탓에 끌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헬스장은 내 몸을 고문하는 공간처럼 느껴졌고 요가원은 활력 없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복싱장.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무작정 집 근처 복싱장으로 향했다. 복싱장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계단 벽면에는 복싱선수들의 사진과 함께 무시무시한(?) 복싱 명언들이 걸려 있었다.
‘불가능,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링 위에서 맞기 전까지는.’
'피하고 때리려 하지 말고 때리고 피해라'
'챔피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챔피언이 되려고 복싱장에 온 건 아니었다. 그런데 곧 챔피언이 될 것만 같았다. 주먹을 피하고 상대방의 얼굴과 몸에 주먹을 꽂아 넣는 상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까지는 복싱장에는 줄넘기 소리와 샌드백 소리,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주먹 소리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복싱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들렸던 소리는 신나는 댄스 음악 소리였다. 일할 때 틀어놓는 노동요 같은 음악. 사람들은 진지했다. 눈빛은 금방이라도 챔피언이 될 것만 같아 보였다. 모두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그 눈빛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어 보였다. 다이어트, 챔피언, 입시, 자신과의 싸움.
태권도를 오래 수련한 유단자들이 정권지르기나 발차기를 하면 도복에서 마찰 소리가 난다. 촥! 촥! 정말 고수들이 낼 수 있는 소리. 복싱장에도 비슷한 소리가 있었다. 입으로 내는 '슥슥' 소리였다. 처음에는 이 소리가 가짜들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비웃었다. '조만간 바람을 가르는 주먹 소리를 선보여줘야겠군.' 부끄럽게도 이 건 나의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입으로 내는 '슥슥' 소리는 동작에 따라 숨을 내뱉고 내쉬는 호흡법이었다. 하마터면 허세 가득한 사람들이 훈련하는 복싱장이라고 오해할 뻔했다.
태권도 3단, 유도 1단의 유단자여도 복싱은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내 속도에 맞게 기초를 잘 다져가며 배우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주먹을 뻗는 법부터 기본 스텝까지 차근차근 배웠다. 하지만 자꾸 눈길이 향한 건. 이리저리 움직이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실력자들과 사각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하는 실력자들의 모습이었다. 고수들은 자유자재 스텝으로 화려한 발재간을 보여주었다. 샌드백을 치는 소리는 흡사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처럼 리드미컬했다.
한눈팔던 그때, 하나의 라운드가 끝나고 공이 울렸다. 정신이 번쩍. 다시 체력 운동에 집중했다. 체력 훈련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체력 훈련 이후에는 거울을 보며 동작을 연습한다. 링에 오르지 않기 때문에 맞을 일도 없고 때릴 일도 없지만 때리고 피하는 연습을 한다. 때리는 동작 직후에는 회피하는 동작을, 회피하는 동작 이후에는 때리는 동작을. 언젠가 링에 오를 그날을 위해.
거울을 보며 쉐도우 복싱을 마치면 코치님이나 관장님이 미트를 잡아주신다. 이때 어떤 동작을 연습하든 항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오른손을 뻗으면 왼손 가드, 왼손을 뻗으면 오른손 가드. 체력 운동을 게을리하면 여기서 티가 난다. 자꾸 땅바닥에서 무언가가 내 팔을 잡아끄는 것 같다. 잠시라도 가드를 아래로 내리면 그 틈을 타고 얼굴에 펀치가 날아온다. 세게 날아오는 것도 아닌데 미트로 얼굴을 한 대 맞으면 정신이 멍해지면서 까만 배경에 명언 하나가 스쳐간다. 실전은 연습처럼, 연습은 실전처럼.
채식과 복싱의 평행이론
복싱은 마냥 때리는 운동도 아니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운동이 아니다. 적당히 치고 빠지기도 하며 때론 온 힘을 쏟아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종 라운드 공이 울릴 때까지 두 발을 링 위에 디딜 수 있는 체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사각 링은 '존버'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채식을 하다 보면 사각 링에 올라 복싱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과 식사하는 자리가 필연적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채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간혹 훅, 어퍼컷, 스트레이트 같은 공격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며 경고성 잽을 던지기도 한다. 카운터로 강한 스트레이트나 훅을 날리기도 하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복싱 자세를 교정해주고 동작을 지도해주는 코치가 있다. 함께 스파링 하는 복싱장 동료도 있다. 채식도 마찬가지다. 혼자보단 둘이, 둘보다는 여럿이, 훨씬 낫다. 비거니즘 동아리, 동물권 활동 단체와 동물권 독서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동료이자 코치이다. 채식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세상에 떠도는 여러 질문들에 대한 반론도 서로 공유한다.
이처럼 복싱과 채식 사이에는 평행이론이 존재한다. 글을 쓰다 보니 이미 마음은 복싱장에 가 있다. 조만간 다시 복싱화를 신고 글러브를 끼고 있을 것만 같다. 작은 대회라도 나가서 상장을 받고 싶단 욕망이 솟아오른다. '63kg급 우승자 이현우, 알고 보니 채식인.'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채식과 복싱이 다른 점이 있기도 하다. 복싱은 링 위에 함께 선 상대가 적이다. 채식은? 그렇지 않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기의 링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한다. 적당히 치고 빠지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존버의 체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