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대하는 세 가지 유형
“제가 고기를 안 먹어서요.”
채식주의자가 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채식주의자임을 밝히는 것이 쉽진 않다.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소개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늘 돌려서 소개했다. "제가 고기를 안 먹어서요"와 같은 표현으로 말이다.
‘채밍아웃’은 채식과 커밍아웃 두 개 단어의 합성어다. 채식주의자임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채식 식당을 알아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채밍아웃을 할지를 더 많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연구실 동료들과 식사를 매번 따로 해야 하나? 아니면 나 때문에 매번 채식식당을 골라야만 할까? 채식한다고 말하는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지면 어쩌지?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채식한다고 하거나 육류가 몸에 안 맞아서 소화가 안 된다고 둘러대는 방법도 생각해봤다. 대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전에 ‘채밍아웃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이미 연구하게 된 것이다.
채밍아웃이 편치 않은 이유는 그동안 쌓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경험 상 대놓고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일방적으로 질문받고 마치 해명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지만 이마저도 적응해 버렸던 걸까? 이제는 그 모든 질문들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채식주의자를 대하는 세 가지 유형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지만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주치의형’이다. “채식하면 단백질 섭취가 힘들다던데..? 몸 괜찮아?” 물론 내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걱정을 가장해 채식은 잘못된 식단이라며 나를 진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주치의형들은 대부분 유언비어형이기도 했다. 근거가 빈약하거나 근거가 없는, 미신에 가까운 주장을 늘어놓기도 한다.
"고기 안 먹으면 힘 못 쓰잖아" 가장 가까운 엄마도 유언비어형이었다. 채식을 하면서 복싱 챔피언이나 유도 챔피언이 되면 주치의형 질문은 사라질 것 같은데, 본업을 버리고서 운동을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도 주치의형 질문을 받을 때마다 채식으로도 영양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예를 들면 하루 권장 단백질 섭취량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주장들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둘째, '연구자형'이다. 연구자형은 다시 한번 '철학자형'과 '과학자형'으로 세분화된다. 철학자형은 "생명 때문이라면 식물도 먹지 말아야지?"라며 질문을 던진다. 고통을 느끼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서 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과학자형은 "식물도 고통을 느끼지 않냐?"라고 질문한다. 질문은 질문을 낳는다. 상대방은 보따리에 담아둔 물건을 꺼내듯 질문을 쏟아낸다. 그때부턴 더 이상 대화가 아니라 흡사 청문회가 된다.
질문의 양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소통이 아니라 해명을 요구한다는 점이 문제다. 질문자가 나의 대답을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제 청문회와 싱크로율도 꽤 높다. 철학자든지 과학자든지 역으로 "왜 육식을 해?"라고 질문하면 “그야 고기가 맛있으니까" 혹은 "원래 인간은 육식을 해왔어"와 같이 답하며 미식가나 인류학자로 돌변한다.
셋째, '존중형'이다. 이들은 채식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몇몇은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한 이들도 있다. 채식주의자의 신념과 식단을 존중한다. 때로는 존경을 보내기도 한다. 채식주의자들을 그다지 귀찮게 하지 않고, 식사를 할 때에도 채식 옵션이 있거나 채식 메뉴를 알아보고자 한다. 존중형을 만나서 대화하고 식사를 하다 보면 그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 같은 미안함(?)마저 들 때가 있다. 물론 고마운 마음이 훨씬 크다. 한 번은 모임이 있는 날만큼은 채식을 해보자는 제안을 주었던 모임도 생각난다. 매우 유쾌하고 도전적인 제안이었다.
"채식주의자 청문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년 좀 넘게 채식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채식 청문회를 치렀다. "채식주의자 요놈, 잘 만났다!" 하는 심보로 의도적으로 질문을 쏟아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을 풀기 위한 질문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들의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것이 나의 의무는 아니지만 채식을 알린다는 생각에 보통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채식 청문회를 치르다 보면 막연했던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서 언어화되는 긍정적인 경험도 하게 된다.
한국채식협회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국내 채식 인구는 약 200만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특히 젊은층 사이에서 채식이 늘어나면서 대형 마트들도 앞다퉈 채식주의 관련 제품들을 모아놓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채식은 '개인의 취향' 문제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틀린 건 아니지만 채식에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 문제나 동물권 실현과 같은 이유 말이다. 그들은 축산업으로 인한 산림 파괴와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 때문에, 또 농장동물들도 고통을 느끼고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존재기에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건강 관리나 체질적인 이유로 채식을 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안타깝게도 '채식 vs. 육식'의 갈등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더욱 심각한 것 같다. 온라인에선 대화와 논쟁을 넘어 비난과 혐오가 오가기도 한다. 채식 관련 기사에는 '업진살 살살 녹는다', '오늘 저녁 메뉴는 치킨'과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아마 이 기사에도 그런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오프라인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채식 문화가 차츰 알려지고 있고 채식 인구 또한 증가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진 육식인이 일상에서 채식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채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난무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작은 다짐을 해본다. 채식 관련 크고 작은 검증에 맞서기로, 나에게로 향하는 채식청문회를 피하지 않기로 말이다. 늘 검증 당하는 채식주의자들이 이 지난하고 불편한 청문회를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주치의형'과 '연구자형'은 줄어들고 '존중형'이 늘어나지 않을까? 채식주의자들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채밍아웃' 하는 그날을 꿈꾸며.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