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0일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올해 3월 대학원에 입학했다. 연구실에 출근한 지 8개월이 된 것이다. 점심 도시락을 싼 지도 어느덧 8개월 차, 솔직히 도시락은 여러모로 정말 불편하다. 재료를 손질해서 요리를 해야 하고 조리된 음식을 도시락통에 담아서 학교와 집을 오가야 한다. 그뿐인가. 먹을 때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야 하고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평소 간편함을 추구하는 편인 데다가 입맛도 까다롭지 않은 내가 8개월 동안 점심 도시락을 챙겨야 했던 이유는, 바로 채식 때문이다.
'근처에 채식 식당이 없으면 어쩌지?'
약속이 생기면 엄지손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생존하기 위한 검색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보물찾기가 아니면 무엇이 보물찾기겠는가. 안타깝게도 보물찾기 성과는 좋지 못했다. 학생식당에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었고 채식 메뉴가 제공되는 주변 식당도 몇 개 되지 않는데다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학교 양식당에는 채식 메뉴라고 불리는 쏘이까스를 판매하고 있지만 비건 메뉴는 아니다. 쏘이까스는 달걀과 우유 성분이 들어가 있어서 락토-오보 베지테리언까지만 먹을 수 있다. 채식 메뉴가 아예 없다는 것보다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동시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건 지향을 하는 사람은 먹을 수 없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내가 다른 단계의 채식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점심때마다 쏘이까스만 먹고서 '쏘이인간'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학교 학생식당에도 채식의 물결이 닿았다
10월 19일, 여느 때와 같이 도시락을 들고서 연구실 동료와 함께 학생식당에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 주 식단표를 훑어봤다. 한 단어가 레이더에 들어왔다. ‘채식’.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얼굴을 식단표 가까이에 대고서 다시 메뉴를 봤다. 초록색 글자로 '채식 Day'가 적혀 있었다.
10월 20일, 8개월 내내 고기 범벅이었던 학생식당에서 드디어 채식 메뉴가 등장했다. 입학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식판에 음식을 담아 식사했다. 비로소 해외에서 국내로, 국내에서도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채식의 물결이 닿은 것이다. 감격스러웠다. 마치 나를 위해 학교에서 준비한 특별행사처럼 느껴졌다.
희열이 느껴지는 점심 식사였다. 단감샐러드는 에피타이저로 먹기에 적합했다. 고기를 형상화한 콩고기볶음은 음식점에서 흔히 판매하는 제육볶음 같았고 들깨두부국은 고소했다. 간혹 "고기 안 먹으면 단백질은 어떻게 섭취해요?"라고 묻는 이들에게 이 식단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두부만으로도 1일 단백질 권장 섭취량은 충분히 섭취할 수 있지만, 들깨두부국과 콩고기볶음을 통해 영양적인 면도 충분한 식단이었다. 게다가 생채소와 볶은 채소, 절인 김치까지. 다양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재밌는 채식 식사였다.
가격은 6,000원. 15분 거리에 있는 맛집 막국수는 7,000원, 도시락을 싸오지 않으면 자주 가는 백반 집 돌솥비빔밥은 5,000원이다. 이에 비해 6,000원은 결코 비싼 금액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맛이나 영양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을뿐더러 양껏 담아올 수 있는 뷔페식이라는 점도 좋았다.
식단표에는 보통 고기의 원산지가 표시되는데 마치 식탁 위 동물(소, 돼지, 닭, 오리, 오징어, 낙지, 연어 등)이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10월 20일, 이 칸은 비어있었다. 적어도 학생식당 음식을 요리하면서 도살되는 동물이 없었음을 의미했다.
채식주의자 선택권 보장과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학생식당 채식 메뉴 운영은 채식주의자의 선택권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량을 낮추고 동물권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채식의 날'은 미국과 유럽 등에서 활발히 시행되고 있고 많은 대학 학생식당에서는 비건 메뉴(달걀과 우유를 비롯한 모든 동물성 식품을 사용하지 않음)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군대와 일부 초중고에서 채식의 날을 시행하고 있고 서울대와 동국대에서 교내 채식뷔페를 운영중이다. '채식 Day'도 채식의 날 캠페인의 일환으로 보인다.
채식 Day가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일주일 중 하루는 도시락을 싸지 않고 학생식당에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에서 채식을 지향하는 학생들을 위해 채식 메뉴, 적어도 채식 옵션 메뉴를 제공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현실적으로 운영상 어려움이 있다면, 일주일 1회 '채식의 날'을 시도하면서 차차 확장해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 채식 옵션 메뉴: 예를 들면 돌솥비빔밥의 계란이나 다진 고기를 빼거나 넣을 수 있도록 주문 옵션을 제공하는 메뉴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
추후 확인 결과, 엄밀히 말하면 채식은 아니었다. 조리할 때 다시다가 들어가기도 하고 국물에는 멸치 육수가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생식당 측을 응원하는 마음이고 지자체나 학교 측에서 원활한 채식day 운영을 위해 교육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