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무슨 음식 해놓을까?”
“아무거나 먹어도 돼, 엄마”
몇 년째 반복되는 엄마와 나의 통화 내용이다. 높임말만 없지, 명절의 어른은 줄곧 아들이다. 명절마다 엄마는 오랜만에 오는 아들을 위해 잔칫상을 준비했다. 여전히 엄마의 마음을 다 알진 못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그 마음이 무엇인지 가닿을 것만 같다.
고기 귀신 아들의 '탈육식' 선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어려서부터 친척 모두가 모여 명절을 쇠는 문화가 없었다. 가족 넷이서 명절을 쇠거나 외가를 방문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명절 음식은 필요하다며 엄마는 전을 부치거나 떡을 주문해 놓곤 했다.
명절 음식뿐이겠는가.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는 '육해공 음식'이 넘쳤다. 육해공 음식이 무엇인가. 육지나 바다에서 수확하는 채소를 포함하여 이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동물을 뜻한다. 육식 문화와 군대 문화가 만들어낸 희한한 용어다. 폭력과 착취가 만나 유머가 되는 세상이라니.
명절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메뉴는 돼지갈비였다. 전이나 떡보다 돼지갈비가 없으면 명절 분위기가 안 날 정도였으니 우리 가족의 돼지갈비 사랑은 별났다고 할 수 있다. 반려견 해피와 똘이가 함께 살면서 돼지갈비를 먹는 횟수가 더욱 증가했다. 갈비를 먹고 살이 조금 남은 갈비뼈를 함께 사는 해피와 똘이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해피와 똘이는 뼈를 오도독 씹어먹었다. 우리 가족은 오도독 소리에 한 번, 음식물 쓰레기가 남지 않는 깨끗한 냄비를 보며 한 번 쾌감을 느꼈다. 돼지갈비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닭볶음탕, 고등어구이, 갈치구이, 삼겹살, 제육볶음, 오리고기 두루치기 등 명절과 크게 관계없는 육식 요리가 상을 가득 채웠다.
명절마다 수많은 동물을 먹었다. 채식과 동물권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밥상에는 육해공 동물이 줄어들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착취 없는 동물 요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내와 가족에게 '탈육식'을 선언했다.
나 때문에 죽는 동물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동물이 처한 현실을 알리는 밥상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 육식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기 때문에 동물 요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렇게 탈육식을 선언한 지 3년이 되어가지만, '고기 귀신(엄마가 나를 부르는 별명)'이 채소만 먹는 풍경이 아직은 낯설은지 고향에 방문할 때마다 엄마는 놀라는 눈치다.
명절 음식 노동은 여전히 엄마들의 몫
그래도 여전히 엄마는 명절이 다가오면 이전처럼 "무슨 음식 해 놓을까?"라고 묻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채식 요리를 해줄지 묻는 것이다. 이제는 엄마도 음식에 동물이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고수 무 생채 무침, 고사리 무침, 두부 김치, 된장찌개, 시래깃국, 두부조림, 무조림 등 그때마다 생각나는 채식 요리를 답한다. 이제는 명절에 고향집에 가면 온갖 채소 요리와 제철 과일이 가득하다.
우리 부부는 철두철미한 논의와 계획 끝에 명절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지만, 명절의 폭탄은 언제나 주방에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더라도 명절 음식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가정이라면,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양가 모두 먹을 양만 적당히 요리하는 데다가 우리 부부에게 '특정 대상'을 위한 명절 요리 노동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명절 요리사는 언제나 엄마다. 주방은 엄마의 독차지다. 간혹 나는 아빠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반찬 투정을 하면 "직접 요리해서 드세요"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랬던 나도 재료 심부름이나 재료 손질은 해봤지만, 요리는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했다.
우리 집뿐일까. 처가, 시가, 외가 친척을 포함한 주변 친구들 집을 둘러보면 명절 요리는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이 요리를 하는 동안 남성은 TV를 보거나 경제, 정치, 취업 등 그럴싸해 보이는 주제의 대화를 나눈다. 설거지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다수는 설거지도 안 한다.
다행히도 '젊은 여성'인 아내는 명절 요리 노동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늙은 여성'인 엄마나 장모님은 여전히 명절 노동중이라는 것을. 젊어서는 구세대의 관습 아래 시집살이와 명절 노동에 시달렸고, 늙어서는 그 악습을 물려주지 않고자 하는 탓에 명절 노동을 지속한다.
내가 간단한 주방일을 하려고 주방에 기웃거릴 때마다 엄마는 "가서 쉬는 게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이 이뤄지는 장소고 각 주방마다 '주방의 원칙'이 있다. 주방은 또 하나의 우주다. 요리를 하려면 식재료와 주방 도구의 위치를 빠삭하게 알아야 한다.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을 보관하는 장소가 다르고 손님 대접용 식기와 디저트용 그릇의 장소가 다르다. 설거지 후 수저를 말리는 방향도 다르다. 고향집 주방의 원칙을 꿰고 있는 엄마가 모든 일을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사 노동마저 효율을 따질 일인가 싶으면서도 고착화된 가사 노동을 재분배할 수 있는 묘수가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엄마나 장모님의 명절 노동을 포함한 주방 노동에는 선의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넉넉하게 키우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이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언젠가 반찬이나 김치를 보내주었는데 단순히 밥 굶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반찬 배송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농도 짙은 사랑 표현이 아니었을까.
이번 설엔 엄마와 함께 담근 비건 김치로, 두부김치찜을
우리 집 사정이 모든 가정을 대변할 수는 없다. 또한 네 식구 음식이기에 대가족에서 준비하는 명절 음식 양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유가 어찌됐건 대다수의 가정에서 명절 노동이 여성에게 과중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매번 반복되는 노동이기에 반드시 재분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에는 뭔가를 시도해 볼까 한다. 채식 이전에는 할 줄 아는 음식이 라면과 계란 프라이뿐이었다. 이제는 할 줄 아는 요리를 다 적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요리 레시피를 알고 재료에 따라 응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엄마와 함께 직접 담근 비건 김치로 요리하는 두부김치찜을 익혔다. 두부김치찜과 이번 겨울을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번 요리했던 메뉴다. 그래서 이번 명절에는 두부김치찜을 엄마에게 선물해볼까 한다.
아내와 논비건 친구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인증된 요리다. 맛있으면 맛있는 대로, 맛없으면 맛없는대로 괜찮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입보다는 손과 발이 진심을 잘 전한다. 착취, 재분배, 명절 노동 등 이런 이야기를 엄마 앞에서 늘어놓느니, 차라리 주방에서 한번이라도 더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련다.
이른바 명절 '착취'를 단번에 없앨 수는 없겠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시도해 볼 요량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식탁 위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꽃이 필 것이고 누구에게도 불편함이 없는 명절이 될지도 모를 테니.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