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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Apr 18. 2022

'정상성'을 강요하는 폭력에 대하여

'채식주의자'를 읽고

* 이 글에는 <채식주의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고기를  먹어요."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와 딸이 나눈 대화다. 대화 끝에 아버지는 딸의 뺨을 때리고서 남자들에게 딸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딸에게 탕수육을 강제로 먹이기 위해서다. 광경을 지켜보던 남동생은 "누나, 웬만하면 먹어. 예, 하고 먹는 시늉만 하면 간단하잖아"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소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장면이다.


책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한강 연작 소설이다. 동일한 사건을 영혜 남편의 시선, 인혜의 남편 인호의 시선, 언니 인혜의 시선에서 풀어냈다. 한강은 소설 <채식주의자>로 2016년 5월 아시아 최초로 맨 부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인물 영혜는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들이 동물성 식품을 입에 대지 않듯. 하지만 영혜가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채식을 지향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소설에서 영혜와 남편은 회사 직원들과 식사 자리를 갖는다. 식사 자리에서 남편의 상사 부인이 영혜에게 채식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 "채식을 하는 이유가 어떤 건가요? 건강 때문에...... 아니면 종교적인 거예요?" 영혜가 '꿈' 때문이라고 말하려고 하자 남편은 다급히 영혜의 말을 가로막고서 위장병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육식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묻지 않는다. 육식은 기본값이기 때문에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탕평채부터 깐풍기, 참치회까지 십여 가지의 화려한(?) 코스 요리가 나오는 동안 남편은 식사 내내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영혜가 불편하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보면서 우리 사회 속 '정상성'을 강요하는 폭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고기를 먹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채식은 비정상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는 '비정상' 안에서조차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낸다.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건강, 종교 때문이라면 정상이지만 영혜처럼 꿈 때문이라면 비정상이다. 마치 모든 인간 군상이 코로나 키트에 두 줄 혹은 한 줄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한강 작가는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끔찍한 우리 사회를 고발한다.


2년 넘게 채식을 해 온 나도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채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은 물론이고 간혹 그 이유가 논리적인지 심사를 받기도 했다. 건강 때문이라면 단백질, 칼슘은 어떻게 섭취하는지부터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고통의 기준은 무엇이냐까지.


넘쳐나는 육식인들 사이에서 그 누구도 '육식을 하는 이유'를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육식이 건강에 어떤 영향이 주는지, 어떤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말이다. 다시 말해 육식이 기본값인 사회에서는 채식이라는 비정상성에 대해 규명해야만 하는 무대만이 생겨난다.


이뿐일까. 사실 이러한 비극은 일상에서 공기처럼 존재한다. 부모가 믿는 종교를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는 것, 남성은 질질 짜지 말고 남자다워야 한다는 것.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간주되고 고쳐지거나 치유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다시 소설로 돌아오자. 가족 식사 자리에서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탕수육을 먹이겠다는 아버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영혜를 붙잡고 있는 남동생, 이를 지켜만 보고 있는 사위, 말려보지만 장인에게 완력에서 밀리는 언니. 결국 아버지는 딸의 입 안에 강제로 탕수육을 짓이긴다.


"처형이 장인을 잡은 팔힘보다 처남이 아내를 잡은 팔힘이 셌으므로, 장인이 처형을 뿌리치고 탕수육을 아내의 입에 갖다 댔다."
- p.50


영혜의 입에 탕수육이 들어가기까지는 단순히 장인의 힘만이 작동한 건 아니다. 동조하는 이에서 방조하는 이까지. 한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구조적인 폭력이 만연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은 최근에 불거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이하 이 대표)의 발언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전장연은 지난 20년간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해왔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생존'과도 같다. 이를 두고 이 대표는 전장연에게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가 망언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거나 말렸더라도 그것을 그가 뿌리칠 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혐오의 선봉에 서서 폭력적인 언사를 보이는 이 대표의 태도도 문제지만, 어쩌면 꽤 많은 시민들이 동조하거나 방조하는 방식으로 이미 혐오의 물결에 올라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의 입 속에 탕수육이 짓이겨진 비극적 장면에서 영혜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태도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이 대표의 망언이 누군가에게 통할 수 있는 이유는 두 다리로 걷는 시민만을 정상으로 규정짓는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되기 때문 아닐까?


탕수육을 강제로 영혜 입으로 넣으려는 장인이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자명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장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과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과연 비폭력적인지 질문하게 된다.


소설 속 장면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소름 끼치게도 닮아있어 가슴이 갑갑해지면서 두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걸까. 아니다. 애초에 정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된다. 적어도 내게 소설 <채식주의자> 육식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영혜라는 인물의 비폭력 투쟁으로 읽힌다.  시대의 모든 '영혜' 비정상으로 규정되거나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길 바란다. 또한 소설 <채식주의자>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 우리는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좋겠다.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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