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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Nov 09. 2020

먹는 동물과 키우는 동물이 따로 있나요?

복날이 되면 보신탕 집에 갔다. 나는 삼계탕(닭고기)을 먹었고 친구들은 보신탕(개고기)을 먹었다. 먹는 건 취향의 문제이고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고기를 먹는 친구들의 취향을 존중했다. 나는 반려견과 식용견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개고기'라는 단어는 매우 자연스럽다. 먹지 않는 사람만큼 먹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식용견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댓글창은 늘 시끄러웠다.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중국과 한국뿐이다. 부끄럽다."

"개고기를 먹는 건 야만이다."

"왜 맨날 개만 못 먹게 하냐? 돼지, 소, 닭은 먹으면서 왜 개만 안 되는 거냐?"

"오늘 저녁 메뉴는 개고기."


그때 나를 뒤흔든 댓글은 개고기를 먹겠다는 댓글이 아니었다. 나를 뒤흔든 댓글은 왜 개만 못 먹게 하냐는 댓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댓글에 혀를 찼다. 대화가 안 된다며 무시하자는 댓글들이 많았고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댓글도 많았다. 하지만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답변한 댓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에게 강아지는 함께 사는 가족이었다. 개를 먹지 않는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먹지 않는 게 당연했다. 돼지는 함께 살지 않았고 돼지와 교감할 기회도 없으니, 돼지를 먹는 건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개는 먹고 돼지는 안 된다는 논리는 무엇이냐는 댓글에, 내가 답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스스로에게는 답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름 그럴싸한 답을 떠올렸다. 세계적으로 돼지와 소와 닭은 먹고 개는 먹지 않으니까 개는 먹어서는 안 된다. 보편성에 따른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개를 먹는다면, 개를 먹어도 되는 일인가?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무책임한 논리인가. 스스로도 그 답에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돼지와 소, 닭은?

왜 나는 개를 먹지 말자는 주장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돼지와 소, 닭을 먹지 말자는 주장에는 '과하다'라고 생각했을까. 개와 돼지는 다르기 때문일까. 나는 채식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이 문제를 고민했다.


개의 고통은 분명히 느껴지는데 돼지, 소, 닭의 고통은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상상력이 필요치 않다. 보고 느끼면 된다. 유튜브에 농장의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한 편이면 충분하다. 개가 학대당하고 착취당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돼지와 소, 닭은 농장에서 학대당하고 착취당하고 강간당한다. 개처럼 고통을 느낀다. 개식용을 반대하는 이들이 개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듯, 돼지의 고통도 느낄 수 있다. 고통은 실재하기 때문에 이해되기보다는 보여지고 느껴진다. 진정 돼지는 먹고 개는 먹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을까. 개는 특별하고 돼지는 그렇지 않은가. 개와 돼지의 어떤 차이가 먹어도 되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되는 동물로 구분할까. 개와 돼지가 서로 다를지라도, 그 게 돼지를 먹어도 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개를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 돼지를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같다.




개의 현실은 직면하고, 돼지의 현실은 외면하는 이유

사람들은 개농장 현실에 익히 알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돼지, 소, 닭 농장 현실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개농장 영상을 보면 불편한 감정이 솟는다. 그 불편함은 보통 타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개를 사육하고 도살하고 팔고 먹는 이들이다. 타인의 사악함에 치를 떤다. 돼지, 소, 닭 농장의 영상을 보면 마찬가지로 불편한 감정이 솟는다. 하지만 개농장 영상보다 훨씬 더 불편하다. 이유는 현실이 참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상이 주는 불편함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이후 일상도 불편해진다. 영상에서 본 농장 속 학대, 폭력, 강간, 착취는 식탁 위 고기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른다. 타인을 향한 비판이 아닌 자신을 향한 비판이기에 더 날카롭고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상처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결국엔 식탁의 문제

결국엔 논리 문제가 아닌 식탁 문제다. 개고기는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살면서 한 번도 입에 대보지 않은 음식이다. 하지만 돼지와 소, 닭은 매일 식탁 위에 오른다. 개고기는 남의 식탁에만 오르지만 돼지, 소, 닭은 내 식탁에 오른다. 개고기를 먹지 말자고 주장하는 건 타인 식탁의 변화를 촉구한다. 강 건너 불구경이다. 반면 돼지, 소, 닭을 먹지 말자고 주장하는 건 일단 내 식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발등에 불이다. 타인의 일상을 변화하도록 요구하는 일은 외치면 끝나는 일이지만, 나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건 외치는 것으로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해자다

개를 먹지 말자고 주장하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를 이미 '먹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개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개고기를 좋아하지만 먹지 말자고 반대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처음부터 개를 먹지 않았거나 개를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개와 교감을 했거나, 개도 사람처럼 감정이 있고 느끼는 존재라는 걸 어떤 방식으로든 느꼈기 때문이다. 채식인도 마찬가지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다른 동물과의 교감 능력도 회복해야 한다. 식탁 위에 고기가 오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가리어져 있다. 식탁과 농장 그리고 도살장을 연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개와의 교감을 식탁과 연결시켰듯, 우리는 돼지 비명소리와 돼지고기가 올라가는 식탁을 연결해야만 한다. 매일 착취하고 학대하고 살해하고 강간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식탁 위 불편함을 마주하면 학살과 강간을 멈출수 있다. 이제 우리의 용기가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DOM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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