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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erumie Jun 15. 2020

떡볶이는 런던의 한(恨)식이다

마지막 남은 떡볶이 떡을 개봉하고 말았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이 있다. 

그날은 딱, 그런 날이었다.


변경된 디자인 스프린트 일정 때문에 바쁜데, 급하게 중요한 발표자료 수정 요청을 받았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자료를 완성했다. 시간이 있었다면 더 자신 있었을 텐데, 부랴부랴 아쉬운 마음으로 자료를 넘겼다.


퇴근할 무렵, 디렉터로부터 메일이 왔다. 

자신 없었던 발표 자료 부분에 코멘트가 달려서 돌아왔다.


시간에 맞춰서 욱여넣다 보니까 흐름이 불안정하고 논리가 부족했다. 코멘트받은 부분은 수정하면 되는데, 고생한 만큼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서러웠다.

 



아, 매콤한 것이 땡긴다.


쒸익거리면서 쫀득한 떡을 씹고, 매콤한 소스가 잔뜩 묻은 라면이 입술을 붓게 할 때까지 면치기를 하고 싶다.



서러운 마음에 서린 한(恨)이 싹 가시도록, 

떡볶이를 원 없이 먹어야 하는, 오늘은 한(恨)식을 먹는 날이다.








밤비와 나는 런던 zone 5에서 6년째 살고 있다.

집 근처에는 한국 슈퍼마켓은 고사하고, 아시안 슈퍼마켓조차 없다.



이동제한령 때문에 한국 슈퍼마켓에 갈 수가 없으니까, 락다운 직전에 런던 zone 1에 위치한 한국 슈퍼마켓에 가서 양손 가득 김치와 한국 식재료를 사 왔다. 냉장고 제일 큰 칸에 떡볶이 떡, 김밥 재료, 끓이기만 하면 되는 찌개 종류를 채워뒀었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도, 냉장고가 비어가는 게 걱정되어서 매 저녁 한식 재료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날 하나씩만 꺼내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떡볶이 떡 한 봉지만 남기고 텅 비었다.


마음에 서러움이 꽉 찬 그날 저녁, 떡볶이 떡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음속이 시끄러웠다. 

매콤 달콤한 떡볶이를 먹으면 스트레스가 매운 열기와 함께 싸악 날아갈 것 같은데, 이번에 덜컥 마지막 떡을 뜯었다가 나중에 또 먹고 싶어 지면 어쩌나 싶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서있는데, 밤비가 말했다. 



떡볶이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줄 거야.  




결국 밤비와 나는 마지막 떡볶이 떡을 개봉하고야 말았다.


유럽용으로 수출하는 유통과정에서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갈라진 밀가루 떡. 

소중한 마지막 떡볶이 떡 봉지를 뜯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우리 집 런치 요정은 디너 요정으로 전직했다. 찬장에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떡볶이 재료용 재료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둘씩 꺼냈다.


작년에 런던에 놀러 왔던 한국 친구가 선물해 준, 유통기한 일주일 남은 신라면
아껴먹다가 딱 세장 남은 냉동 부산 어묵
너구리 라면 끓일 때 따로 보관해둔 다시마 한 조각


바닥이 보일랑 말랑한 고추장통을 긁어서 만든 떡볶이 양념을 만들었다. 고추장 한 숟갈이라도 놓칠까 싹싹 긁어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 넣었다. 멀겋던 국물이 뭉근해질 때까지, 떡볶이를 보다가 매콤한 기운을 핑계 삼아 눈물을 찔끔 흘렸다.



집에 가고 싶다…

아빠, 엄마, 동생을 못 본 지 2년이 되어간다. 고약한 코로나 19 때문에 하늘길이 막혀버린 지금. 떡볶이의 매콤 달콤한 향기를 맡으니까 갑자기 가족과 함께 일요일 점심마다 먹었던 떡볶이의 향기와 기억이 섞여버렸다. 가족과 함께 먹는 떡볶이에는 말없이 위로해주는 힘이 있었는데, 뒤섞인 향기 때문에 그리움이 폭발해버렸다.








일요일엔 (엄마가) 떡볶이 요리사


우리 부모님은 주말 부부였다. 

동생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빠는 직업 특성상 평일에는 지방 현장에서 지냈다. 아빠는 금요일 늦은 밤에 서울에 올라와서, 일요일 이른 오후에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우리 네 가족이 모여서 도란도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주말뿐이었다.


동생과 나는 아빠가 없는 평일이 다가오는 게 싫었다. 아빠가 일요일 아침부터 지방 현장에 다시 내려갈 짐을 싸면, 우리는 샐쭉하게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토끼 같은 새끼들을 두고 다시 일터로 나가는 아빠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텐데, 어린 우리는 서운함을 감출 줄을 몰랐다. 


아빠랑 헤어지는 게 우리의 서운함을 눈치챈 엄마는 일요일 점심마다 떡볶이를 요리했다. 떡볶이는 동생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의 특별 메뉴였다. 


아빠는 매운 음식은 다 싫어한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 한 숟가락만 먹어도 이마에 땀이 송송 솟아나는 신기한 체질을 가진 아빠는 매운 음식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일요일 점심마다 식탁에 차려지는 매콤 달콤한 떡볶이를 볼 때는 불평 한 마디가 없었다. 어린 자식들이 서운해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질까 싶었는지, 아빠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우리 밥그릇에 떡볶이를 덜어줬다. 땀이 나는 이마를 계속 수건으로 닦으면서 아빠는 조용하게 고추장 덜 묻은 떡을 골라서 먹었다.


 

엄마의 국자는 공평했다.

떡볶이 취향이 똑같은 동생과 나는 떡볶이에 들어간 라면을 더 먹겠다고 싸웠다. 투닥대는 젓가락 사이를 가로질러서, 엄마는 정의의 (?) 국자로 우리 밥그릇에 공평하게 떡볶이를 나눠 담았다. 우리 밥그릇을 채워준 후에, 아빠에게는 덜 매운 양배추, 어묵, 그리고 특별하게 계란 하나를 더 얹어서 줬다. 일주일간 고생하는데, 힘내라는 의미였을까?  



일요일 점심, 꽤 오랜 시간 동안 떡볶이는 우리 가족의 고정 메뉴였다.



부모님의 주말 부부 생활이 끝난 것은 동생과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다 큰 자식들과 주말 점심을 같이 하는 날은 점차 줄었다. 그래도 가족 중 누군가 걱정 근심이 있을 때, 말없이 위로하는 방법은 역시 떡볶이였다.



런던에 오기 전 날, 매운맛 핑계를 대며 부모님은 훌쩍였다.

잘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고 런던에 가서 살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던 것이 6년 전이다. 딸이 하겠다고 하면 아빠와 엄마는 막는 일이 없었다. 10년 전에, 프랑스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뜬금없이 말했을 때도, 부모님은 안된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런던으로 출국하는 날을 하루 앞두고, 오랜만에 우리 가족은 떡볶이를 먹었다. 


매운 것을 싫어하는 아빠가, 그 날은 훌쩍거리는 소리를 평소보다 더 크게 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엄마도 고추장이 너무 많이 들어갔나 보다고 중얼거리면서 자꾸 코를 풀었다. 매콤한 게 떡볶이인지, 딸과의 이별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훌쩍이며 떡볶이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 모두 빨갛게 부은 눈코 입을 보면서 억지로 웃었다. 말없이 훌쩍대던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런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떠올랐었다.







떡볶이 한(恨) 입

런던에서 6년째, 살다 보니까 울고 싶을 만큼 서러운 날도 있었다. 억울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스스로 영국 생활을 선택한 주제에 누구를 탓하겠나 싶어서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눈물을 삼킬 때마다, 가족의 위로가 고팠다. 같이 훌쩍거리며 매콤함을 삼키던 그 시간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아빠가 연신 이마에 땀을 닦으면서 먹고,
엄마가 국자로 ‘골고루’ 담아주고,
동생과 얼마 안 남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쪼아 먹던,
떡볶이는 가족과 함께하던 그리움의 맛이다.


가족과 함께하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릴 수 있는 떡볶이를 씹어 삼키면, 켜켜이 쌓였던 해외 생활의 답답함과 서러움이 풀렸다.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떨어져서 사는 우리 가족이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매콤하고 달콤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다.  


매운맛을 견디려고 쒸익거리면서 울기도 하고, 달콤한 맛을 느끼려고 우걱우걱 입 안 가득 욱여넣기도 하고, 짠맛을 이기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런던에서 한(恨)을 삼켜야 하는 날에, 나는 한(恨)식으로 떡볶이를 먹는다.



그런데, 마지막 떡볶이 떡을 다 먹어버렸으니, 이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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