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디자인 석사 과정이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수업이 끝난 어느 날 오후, 스튜디오에 남은 학생들이 하나둘씩 수업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비스 디자인과 관련된 이론 수업이나, 트렌드 분석 같은 내용의 수업을 기대했는데, 매일 우리끼리 토론만 하면 새로운 지식은 언제 쌓느냐는 식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수업시간에는 조용했던 학생들까지 하나 둘 목소리를 보탰다. 오호라,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특별히 수업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들이 언제쯤 reading list의 책들을 가지고 수업할 건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참고 자료는 참고만!
석사 과정 시작 한 달 전쯤, 우리는 서비스 디자인 및 디자인 리서치 관련 서적의 목록이 담긴 reading list를 이메일로 전달받았었다. 한국에서 대학교 다니던 때, 교수님이 읽어오라는 자료가 있으면 꼭 읽었었다. 그 말은, 다음 수업 때 그 자료와 관련된 내용의 강의가 이어질 테니까. 만약 운이 안 좋으면, 자료에 대한 생각을 교수님께서 물어보실 테고, 그럼 교실에는 고요한 침묵이 흐를 수도 있다. 일단 읽고, 혹시 모를 질문에 대비해서 필기도 조금 해두곤 했다.
그래서 입학 전에 코스 리더가 보내준 책 목록을 보고, 석사 과정에는 읽어야 할 책이 참 많구나, 중얼대면서 보내준 책들을 한 권씩 읽었었다. 영어로 된 소설책 한 권 제대로 읽는데도 엄청 느린 편이어서, 논문이나 학술서 같은 아카데미 영어에 적응을 못했다. 먹기 싫은데 몸에는 좋은 채소를 꾸역꾸역 먹듯이 책을 읽었다. 수업에서 혹시 질문을 받을까 싶어서 모르는 개념이나 방법론에 대해 적어두기도 했었다.
석사 과정이 시작된 후에, 그동안 읽었던 책에 대해서 선생님은 단 한 줄도 물어보지 않았다. 서비스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물어보는 것이 수업 첫날의 주제였는데, 책을 열심히 읽어 온 학생들이 손을 들고 얼른 대답했다.
“A 책에 보면, 서비스의 개념은…”
“디자이너 C가 말한 서비스 디자인은…”
오... 헤르미온느가 이 반에는 여러 명 있는 것 같았다. 열정적인 답이 계속 튀어나오는데, 코스 리더와 교수님은 느긋하게 웃었다. 책에서 읽고 적어둔 답변들이 다 떨어져 갈 때쯤, 교수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때요?
교실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석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지금 약 올리는 건가? 왜 우리의 생각을 묻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계에서 유명하고 잘 나가는 교수님의 하늘 같은 가르침을 받아서 전문 지식을 쌓는 게 석사 과정 아닌가? 왜 몰라서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서비스 디자인의 개념에 대한 생각을 묻는 걸까?
짓궂은 열린 질문
강의는 첫날부터 쭈욱 열린 질문으로 이어졌다. 매 번 우리는 각자의 생각으로 의견을 내고, 답변을 했지만, 정답을 찾은 것 같지 않은 기분으로 수업을 마쳤다.
퍼소나는 왜 필요할까?
UX 하고 서비스 디자인은 다른 건가?
스토리텔링은 뭘까?
서비스 블루프린트는 왜 만들어졌을까?
철학 수업도 아니고, '왜'를 물어보시는 교수님의 웃는 표정이 점점 얄미워졌다.
어휴, 모르니까 배우러 왔죠!
영국의 교수법 (pedagogy) = 물고기 잡는 법
우리 교수님들은 자가주도 학습을 유도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선생님 중심의 학습법보다는 학생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개인의 의견을 가지고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학생 중심의 학습법을 주로 적용하는 것 같다. 만약 학생이 지식을 습득하다가 막히면, 피드백과 질문으로 다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방식의 교수법이다.
서비스 디자인이라는 물고기를 잡아다가 우리 입에 쏙쏙 넣어줄 거라고 우리 반의 많은 학생들이 한 달 동안 기다리다가 지친 상태였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교수님과 선생님들의 교육 방법을 몰랐다가 제풀에 지친 셈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선생님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우리 반 학생들은 자기의 생각을 선생님들에게 전달했다. 질문 말고, 답을 알고 싶다고. 어휴, 우리 반 친구들 똘똘한 것은 이때부터 알아봤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학생부터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가 둘이나 되는 어머니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개성이 강한 MA SEDI 친구들.
교수님과 선생님이 기분 나빠할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반응이 어째 익숙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어떤 수업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해볼까?
핵심은 콜라보레이션
학생들이 불만을 쏟아내는데 거기에 또 질문으로 대답하는 선생님들의 배짱에 거의 넘어갈 뻔했다. 뛰는 우리 반 위에 나는 선생님들이랄까. 학생들이 기대했던 수업과, 교수님과 선생님들이 지향하는 교수법을 모두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토론을 했다.
수업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활동이다. 지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있고, 습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꼭 선생님, 습득하는 사람이 학생이라는 법은 없다. 열린 질문과 토론 속에서 학생들과 선생님은 서로 배우고 가르친다. 학생들의 논리적인 의견과 생각을 반영해서 선생님도 배운다.
서비스 디자인의 핵심은 콜라보레이션. 우리는 콜라보레이션을 통해서 서비스 디자인의 핵심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수업 방식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난 후에, 실제로 교실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갑자기 교과서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필기 위주 수업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바뀐 것은 우리가 서로 수업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물고기를 찾던 학생들이 잡는 법에 집중했고, 선생님들은 예전보다 더 자세하게 왜 잡는 법이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소개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마치 재즈 연주처럼 수업에서 지식을 나누고 습득하는 과정이 갈수록 매끄러워졌다.
공포의 질문 타임
한국에서 교수님이 강의실에서 ‘질문 있는 사람~’ 이렇게 말할 때 손을 들어본 적이 얼마나 될까?
정말 손에 꼽을 것 같다. 괜히 질문했다가, 여태까지 뭐 들었냐고 혼날 것 같기도 하고. 지겨운 수업이 더 길어지는 게 싫어서 손을 안 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국에서 석사과정을 하면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 있다면 바로 Q&A, 질문 타임이다.
서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스튜디오에서, 생글거리며 질문 폭탄을 던지는 교수님에게 두세 시간쯤 토론을 ‘당하다’ 보면 반격의 기회가 온다. 토론 중에 나오는 학생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피드백을 주던 선생님이 “혹시 이 부분에 질문 있어요?”라고 되물어보는 그 순간. Q&A는 어떤 질문도 환영받는 시간이라서 궁금한 대로 다 물어볼 수 있다.
수업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할 수도 있고
교수님의 의견은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있고
너무 이론적인 접근 같은데 실제 사례가 있냐고 따질 수도 있고
교수님이 어디까지 받아칠 수 있을까 싶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도 있는데, 그럴 때는 마치 대나무 숲에서 진검승부를 펼치는 무사들을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이 난다. 어떻게 저런 고차원적인 질문을 할까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선생님이 생각에 잠길만큼 깊이 있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영국의 수업 방식에 많이 당황했고, 우리 반 헤르미온느들의 수준 높은 질문에 기가 조금 눌렸지만, 즐기니까 점점 재미있어졌다. Q&A 시간이 찾아오면,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둘 던지면서 간을 봤다. 나중에는 수업을 듣는 동안에 질문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뒀다가 Q&A 시간이 아닌 때에도 교수님과 선생님을 붙잡고 물어봤다.
Good question!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가 던진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면 기분이 진짜 좋다. 혹시 지금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선생님에게 이 대답을 들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