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원은 네트워킹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대학원 건물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슴에 이름이 적힌 하얀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학생도, 선생님도 아닌, 그 사람들은 외부인이다. 외부인이 왜 이렇게 많을까 궁금했는데, 첫 실무자 특강 수업을 듣고 알았다. 교내에 돌아다니는 외부인들이 주로 수업이나 발표회에 초청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졸업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강의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 기회가 있으면 (코스 리더가 동의한 선에서) 학생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한다. 직접 석사 과정 학생 전체를 회사로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 견학도 하고, 실무자들도 만나게 해 주고, 그리고 곧 다가올 채용 소식까지 알려주면서, 나중에 졸업하면 우리 회사에 지원해달라고 러브콜을 보낸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잔뜩 준비되어 있는데, 확실하게 기회를 잡으려면 꼭 필요한 게 있다.
바로 FLEX!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어필하고 과시할 수 있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 우리 반 전체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런던 오피스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스튜디오로 시작해서 서비스 디자인 프로젝트들을 다루다가, 큰 컨설팅 회사에 인수된 곳이었다. 방학 전, 교실 밖에서 견학을 한다니까 신나서 소풍 가는 마음으로 오피스에 찾아갔다.
유치원 학생처럼 두 줄로 쭉 서서 외부인 출입증을 받고, 오피스에 들어갔다.
실무자 강의나 발표를 들으면서 서비스 디자이너들은 이렇게 일하는구나~하고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회사에 가서 보니까 더 실감이 났다. 하얀 벽을 빼곡하게 채운 포스트잇과, 전략적인 다이어그램이 그려진 화이트보드, 그리고 제일 멋있는 건 진지한 얼굴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모습이었다. 대학원 생활을 마칠 때, 나도 이 사람들처럼 일하면 좋겠다고 몰래 상상해보기도 했다.
여행 가이드처럼 학생들을 데리고 오피스를 구경시켜준 회사 사람들은 잠시 휴식 시간이라면서 사내 카페로 우리를 데려갔다. 번쩍번쩍한 회사 내부를 구경하느라 한참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우리 반 학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얌전한 고양이와 부뚜막
더운데 무슨 견학이냐고 툴툴대던 녀석부터, 이 회사에 별로 관심 없다던 녀석까지 커피 타임을 틈타서 실무자들에게 자기 어필을 하고 있었다.
소풍 온 것 같다고 설레기만 했지, 회사를 견학하는 게 나를 소개하고, 채용공고가 날 때까지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굴던 우리 반의 빠른 머리 회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휴식 시간에, 포트폴리오 피드백도 받고, 개인 연락처도 받고, 졸업 프로젝트 전시회 때 오라고 초대까지 하는 여유.
어휴, 순진했구나…한숨이 나왔다.
견학을 마치고 선생님은 펍에서 한잔 하자고 학생들을 불렀다. 신나게 펍으로 달려가는 우리 반 애들을 보면서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오는 바람에 실무자들하고 얘기할 때 눈도장을 못 찍은 것 같아서 속상했다. 다들 신나 하는데, 나 혼자 주눅 들어있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코스 리더가 와서 말을 붙였다.
엘리베이터 피치, 연습해보면 어떨까?
엘리베이터 피치?
엘리베이터 피치라면, 마케팅 수업이나 해커톤 이벤트에서 했던 1분 이내로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그걸 말하는 건가? 자기 어필을 잘 못해서 기가 죽었는데 왜 사업 아이디어 발표 방법을 연습하라는 거지?
내 얼굴에 비친 물음표를 읽었는지, 코스 리더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서비스 디자인 석사 과정을 통해서 만나는 학교 ‘밖’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상대방의 관심사와 상황에 맞게 자신을 소개하는 연습을 하자는 거였다. 연습 방법도 엄청 간단했다.
엘리베이터 피치를 5분, 3분, 그리고 1분 단위로 준비하기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말하기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한 줄로 설명하기
어떤 기회를 찾고 있는지 덧붙이기
꿀팁이었다.
여름방학부터는 선생님들 도움 없이 1인 졸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프로젝트에 필요하다면 기업 파트너도 만들고, 프로토타입 테스터도 구하고... 모두 스스로 해야 하는데, 사람들을 만나서 조력자로 만들려면 자기소개부터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피날레는 졸업 전시회
학기 중에 종종 보였던 외부인들이 학교 전체를 채우는 날이 바로 졸업 전시회 날이다. 우리 학교 졸업 전시회는 퀄리티가 높다. 학생들의 작품을 감상하러 오는 외부인들이 그 자리에서 채용 결정을 하는 일이 졸업 전시회 내내 일어난다.
누가 언제, 나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기회를 줄 수 있는지 모르는 날.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쫄지 말고, 밀당을 잘 하면서 자신을 매력적으로 소개한다면 졸업 후의 진로를 탐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나를 채용해주세요’라고 밀어붙이기보다, 상대방이 ‘우리 회사에 관심 있어요?’라고 끌리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감 FLEX, 그 끝을 보여주자
사실 석사 과정을 마치는 날이 다가올수록, 많은 학생들이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졸업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취업 준비도 같이 했었는데, 20개 정도 회사에 지원했었고, 그중에서 10개 정도가 면접을 요청했었다. 졸업 전시회는 다가오는데, 면접 본 기업들은 최종 면접 결과 발표를 자꾸 미루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고 싶은데, 잘 안 풀리니까 자꾸 위축됐었다. 하지만 졸업 전시회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1년 3개월 동안 즐겁고 재미있게 배웠던 서비스 디자인,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려면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자신감을 뿜어내고 싶었다.
여름방학부터 단련한 엘리베이터 피치와, 언제든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와 아이패드도 준비하고, 작은 명함도 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하고 일하고 싶어 질 거야!
졸업 전시회 첫날, 전시장으로 가기 전에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회사를 골라서 갈 수 있을 거라고. 이미지 메이킹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거울 속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서비스 디자이너가 서 있었다.
자신감을 불어넣는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했는지, 졸업 전시회 중에 정말로 몇 군데 회사에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졸업 프로젝트 콜라보레이션 파트너였던 기업에서 오퍼를 주고 싶다고 했을 땐 그 자리에서 뛰고 싶을 만큼 기뻤다.
FLEX 그 후의 이야기
여담이지만, 졸업 전시회 중에 받은 오퍼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몇 주를 면접 결과만 기다리면서 쫄아있었던 주제에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하지만 졸업 전시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하는 나를 보니까,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진짜로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법같이 졸업 전시회 2주 후에, 지금의 회사를 만났다.
서류 접수부터 면접까지 딱 1주일. 크리스마스 전날, 나는 BBC UX Architect가 됐다. 채용 당시 면접관이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입사 첫날 만나서 왜 나를 뽑았는지 물어봤었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는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몰래 웃었다.
자신감 FLEX,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