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영국에서 살려면

by Rumierumie

남편이 이직을 했다.

원래 다니던 회사는 3년 동안 정이 들었던 회사였는데, mid-weight에서 senior로 승진하려는 자신의 커리어 계발 계획과 회사의 채용 계획이 맞질 않아서 이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코로나 19 때문에 회사마다 채용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는데, 커리어를 계속 관리하는 남편이 장하다.


첫 출근 후 2주가 지난 금요일 저녁, 남편에게 소감을 물었다.

Senior가 되어도 별로 변하는 게 없는 것 같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남편을 보며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걸까, 남편이 일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했다. 예전보다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프로젝트와 팀을 파악하고 있달까?


피식거리다가 드는 생각.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더니 진짠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해석하기 나름인 것 같다. 특히, 사람이 바뀐다가 아니라 만든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그게 그거 아닌가? 쉽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잘 안 넘어가진다. 왜냐하면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바뀌어도 왠지 나는 안 바뀐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 프랑스, 영국, 자리를 세 번 바꿔봤다.

서울을 떠나 파리와 런던에서 살 때, 사람 사는 게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걸어 다니기만 해도 전 세계 사람들이 온갖 나라 말로 대화를 한다. 이태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나라 음식들이 어느 동네를 가도 시장 길에 주루룩 늘어서 있다. 직장 생활도 문화도 다 다르다. 이렇게나 다른 환경에서 살면, 새로운 자리에 잘 적응하라고 슈퍼파워 같은 것이 생겨서 나를 확 바꿀 것 같았는데…




나는 나, 영국은 영국

우습지만, 영국에서 6년을 살았어도 아직 나는 나다.

쫄보에, 눈치가 별로 없고, 낯도 가리는 사람. 그리고 “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라는 개똥철학도 변함이 없다. 생각만 하면서 두려워하기보다, 직접 경험하면서 깨우치는 쪽을 선택하는 게 좋다.


궁금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즐겁다. 만약에 영국이 아니었더래도, 마음 가는 대로 계속 걷다가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을 것 같다.


어쩌다가 영국에서 워홀러, 직장인, 유학생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국이라는 자리가 나에게 이 역할을 준 것 같지는 않다. 태어나서 자란 나라를 떠나서, 환경도 문화도 바뀌어도, 계속 나처럼 살려고 하다 보니까 예전엔 몰랐던 나의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오히려 더욱 나다워지는 것 같다.


오호라, 어쩌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뜻은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통해서 자기를 덧붙여가며 성장하니까 만든다고 표현한 것 아닐까?


해외 생활을 하다가 가끔씩 내가 어디에 사는지 관심이 없어진다. 서울인지, 파리인지, 런던인지, 지금 당장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보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돌아보면 배짱이 두둑해진다. 이리저리 치고박으면서 얻은 경험과 함께라면, 다음에 다른 장소로 옮겨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다.


프랑스를 거쳐 영국까지 10년. 그리고 지금 또다시 앞으로, 앞으로.

런던 다음엔 어디에서 나를 되돌아보게 될까?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나는 ‘앞으로’ 동요를 좋아한다.

동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윤석중 작가가 작사한 노래, ‘앞으로’. 짧고 발랄한 노래를 부르면서 산책을 하면 흥이 폭발하는데, 힘차게 팔을 휘저으면서 발을 크게 구르면 엄청 신난다. 동요 가사인데, 꼭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그린 것 같아서 좋아하기도 한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동요의 첫 부분처럼, 호기심과 꿈을 따라서 한국을 떠나 영국까지 왔다.

영국으로 오기까지, 20대를 지나 30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에서 온 직장 동료들도 만나고, 공부에 같은 뜻을 두고 런던에 모인 서비스 디자이너 꿈나무들도 만나고, 심지어 브런치 작가들도 만나게 됐다. 자꾸 걷기만 했을 뿐인데, 정말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난다.


그리고 이 노래를 좋아하는 또 한 가지 이유.

앞으로 영국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나에게 동요 가사가 응원을 보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해외생활을 하면서 온 세상 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우는 날도 생긴다. 다른 문화와 언어 속에서 출발선보다 한참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항상 따라다닌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꿈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 텐데, 힘든 일과 어려움이 무서워서 주춤하는 날도 있을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 동요 뒷부분을 떠올린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웃고 즐거워해서, 그 소리가 저 멀리 달까지 닿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계속 나아가면 된다고.



우리 각자의 속도로, 때로는 달리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면서 가도 된다. 가끔 어디에 사는지 관심 없는 채로, 성장하는 우리만 보고 가자.


그렇게 계속 앞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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