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mierumie May 27. 2020

따로 또 같이하는 점심시간

재택근무하면서 점심 먹기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할 때, 항상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었다.


도시락을 싸서 다닐 때는 도시락 ‘파’가 있었다.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사 먹으려니까 회사 근처 맛집 탐방 ‘단’이 있었다.


모든 ‘파’와 ‘단’은 한결같이 전투적으로 먹었다.  뭔가 먹어야 또 일하니까 먹어야한다는 전투 정신이 맛으로 전해질만큼.

 


꼭 같이 먹어야 할까?

맛있는 것을 천천히 먹고, 새로운 것도 먹어보고, 때로는 굶어보기도 하고.

그저 숨통 트이는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그날부터 혼자 카페 놀이도 하고, 한 시간 내내 걷기만 하는 산책 놀이도 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는 ‘파’와 ‘단’을 뒤로하자, 혼자 숨통이 트이는 시간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런던에서 직장에 다닐 때는 개성 강한 점심시간 문화에 매번 새롭게 적응했다.


첫 번째 회사에는 점심을 직접 만들어 주는 오픈 키친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급식을 받던 것처럼 길게 줄을 서서, 직장 동료들하고 기다리는 동안 수다도 떨고, 어떤 메뉴를 고를지 고민도 하면서. 급식문화로 돌아가는 색다른 체험을 즐겼다.


중간에 회사 건물이 이사 가면서 meat, fish, veg 세 가지 종류의 메뉴가 있는 도시락으로 바뀌었을 때, 서서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던 패턴으로 되돌아갔다.   


같이 먹을 때는 그 나름대로의 정겨움이 있지만,
혼자 먹을 때는 잠시 마음에 쉼표를 남길 수 있으니까,
그날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선택을 했다.


지금의 직장은 회사 규모가 첫 번째 회사보다 커서, 옵션도 더 많아졌다.


첫 번째 옵션은 구내식당이다.

첫 번째 회사처럼 오픈 키친이 있고, 배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공영 방송국이므로 점심은 개인이 스스로 돈을 내고 사 먹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주변 식당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이어서 사람이 많다.



워낙 왁자지껄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간편하게 크로와상이랑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싶은 날에 구내식당에 가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두 번째는 폰 부스다.

회사 각 층마다 폰 부스라고 부르는 사방이 투명하고 방음 처리가 잘 되는 박스가 여러 개 배치되어 있다. 점심시간에 업무 전화를 하면서 조용하게 자신만의 점심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방음도 잘 되는데, 통풍은 안되어서 음식 냄새가 부스 안에 밴다. 점심시간에는 제대로 휴식하고 싶고, 냄새도 풍기고 싶지 않아서 폰 부스는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야외 테라스다.

Broadcast Centre에는 1층과 5층에 각각 큰 테라스가 있어서 날씨가 좋은 날 햇빛을 즐기면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아침 내내 회의하면서 잔뜩 머리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늘을 보며 되새김질 하기에 딱 좋은 장소다. 혼자 간단한 점심을 먹고 싶을 때 가장 자주 찾는 곳이다.   








재택근무 12주 차에 들어서니까,

우리 집의 런치 요정이 새로운 점심시간을 창조하고 있었다.



7년 동안 런던 남자 친구이었다가, 3년 전부터 런던 남편으로 신분 상승(?)한 밤비는 12시가 되면 점심을 차린다.


한국의 우렁각시처럼, 런던에는 런치 요정이 있다.

요정이 탄생한 것은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둘째 주부터다.


재택근무 첫 주에 우리는 각자 미팅이 없는 시간에 점심을 알아서 먹었다. 주방에 들락거리는 사람 따로, 회사 일로 돌아가는 사람 따로, 박자가 안 맞는 음악처럼 우리의 점심시간은 엉망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처음 겪어보는 집이면서, 회사이면서, 점심시간인 이 시간.

장기적으로 견디려면 뭔가 정해져야 할 것 같았다.


밤비는 점심시간을 한 번에 같이 보내면 좋을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날부터 우리는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에 맞춰 미리 각자의 팀 캘린더에 휴식 시간 1시간을 적어뒀다.



12주째, 여전히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12시 전에 끝난다던 캐치업 미팅이 끝없이 이어지는 날
점심시간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과 미팅을 해야 하는 날
1시에 시작한다던 워크숍이 갑자기 15분 당겨졌다고 메시지가 오는 날


점심시간이 계획대로 지켜질 수 없을 때, 우리는 정체모를 수신호를 보내면서 대책을 세운다.  



우리는 점심시간을 지키려고 한다.

삶과 회사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우리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재택근무 첫 주에 배웠다.



밥을 먹고, 쉬는 시간만큼은 마음 편한 사람과 함께 온전한 식사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지켜서 어떤 음식을 차려먹냐 하면,



메뉴는 엄청 소소하다.

옵션이 많이서 걱정하던 회사에서의 점심시간과 비교하면, 진짜 평범한 음식들이다.


어제 먹고 남은 파스타
편의점에서 할인하길래 산 레토르트 도시락
한인 슈퍼에 갈 수 없어서 아껴먹고 있는 비빔면


평범하고 소소한 점심을 12주째 먹는데, 이 시간은 항상 맛있다.



어떤 것을 먹는지, 어디서 먹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지키면서 삶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점심시간에도 가능해졌다는 것이 입 안에 맛을 돌게 한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특별한 점심시간, 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계속 지키고 싶다.


내일은 우리 뭐 먹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에서는 출근할 때 뭐 입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