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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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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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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서늘하다가 덥덥

일러스트 : 여름의 맛 by 최집사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아직 7월은 오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화장실 세면대를 씻고 물기를 제거하고 선풍기를 틀어 놓는 일이 루틴이 되었다. 지구에 온난화가 찾아오고 한반도에 장마가 찾아오듯 우주가 만든 최적의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물 때와 곰팡이를 막을 순 없다. 그저 지지 않는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간사하고 나약한 이 미물이 또 하나 할 수 있는 건 아주 추운 겨울을 떠올리는 일이다. 숨 막히는 더위 공격과 습기 폭격에 번갈이 시달려, 질릴 대로 질려버리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동공을 한껏 열고 추운 겨울의 이불속을 떠올린다. 푹신푹신한 감촉과 따뜻한 온기… 그 속에서 찐 감자 자세로 귤을 까먹는 장면을 알아듣지 못하는 냥이들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한다. 그동안만큼은 매미의 울음소리도 잦아들고 내 안의 용광로도 잠잠해진다.



오전 그림 작업을 끝내고 토마토를 꺼내 페스토를 만들었다. 장날이면 한 소쿠리 5천 원 하던 게 어제는 3천 원에 팔고 있었다. 바나나도 5천 원 하던걸 3천 원에 팔고 있어 마지막 홀로 남은 아이를 냉큼 집어왔다. 얼려서 요거트에 넣어먹어야지. 만 원의 행복처럼 콩 국까지 한 병 사서 돌아오니 문득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던데, 이참에 2004년의 여름을 다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상상이 들었다. 음…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땐 휴학하고 마트에 들어가 카데기에 매진하고 있던 때이다. 반대로 그 시절 내가 지금을 상상하는 쪽이 평화로울 듯.



크리스마스 케이크처럼 장마가 오기 전까지는 토마토의 계절이다 정의한다.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하면 그녀도 갱년기를 맞는다. 다행히 미리 사놓고 페스토를 만들어 놓으면 여름의 맛을 이리저리 활용할 수 있다. 비록 불 앞에서 땀을 좀 흘려야 하지만, 한참을 졸여도 케첩 한 병 양 밖에 되지 않지만 기꺼이 오늘의 여름을 즐기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동네 빵집에서 발효종으로 만든 투박하고 시큼하고 질긴 솥뚜껑만 한 깜바뉴를 데려온다. 그걸 두툼하게 썰어 겉만 살짝 구운 뒤 차가운 페스토를 듬뿍 올려먹는 걸 좋아한다. 크리스마스의 딸기 케이크처럼 그렇게 나만의 여름 케이크를 만들어 먹으면 결코 이길 순 없더라도 절대로 지지않는 마음이 된다.



다가오는 불행을 피해 갈 방법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은 불행이 코앞에 닥칠 때까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세팅되었다. 동시에 오지 않은 만 가지의 불행을 상상하는 능력도 주어졌다. 극단적인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건 윌터나 로또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 저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최대한 효율적이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지금 이 계절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다. 상상은 상상 안에 있을 때만이 달콤하고 안전할 수 있다. 뒷걸음 치치 말고, 앞서 나가지 말고, 딱 오늘의 걸음만큼 나아가며 살다 보면 불행을 피할 순 없더라도 행복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8oYYumP_uN/?igsh=dHNuZ2w5c3gzYTV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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