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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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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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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한풀 꺾인 더위

일러스트 : 서랍여는 고양이 by 최집사



오매불망 기다리던 원두가 왔다. 오전 집안일을 해놓고 지난 저녁에 한땀한땀 내려놓은 콜드브루로 라떼를 만들었다. 식탁에 앉아 일정과 장 볼 것들을 정리하고 일생일대의 중대한 고민에 빠졌다. 뭘 만들어 먹지… 이 고민은 왜 맨날 하는지 모르겠다. 집 앞 가게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여름엔 된장 지져서 채소랑 비벼 먹는 게 젤 맛있고 했다. 라디오에선 황태 미역국을 차갑게 두면 냉국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림 작업을 마무리하고 곧장 자전거를 타고 채소가게로 갔다. 온 동네 아줌마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누군가의 장바구니 속을 염탐하며 두부 한 모와 오이, 버섯, 단배추, 그리고 막국수를 샀다.



 요며칠 우리 집 메뉴는 카레다. 오늘은 새로 사 온 느타리를 노릇하게 구워 남아 있던 카레 위에 올려 먹었다. 반려인이 느타리 굽는 냄새를 맡고 고기인 줄 알고 연신 주방을 기웃거렸다. 후식으로 참외와 오메기 떡, 제주귤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그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양치를 하고 와 가스렌지에 계란을 삶을 물을 올렸다. 잠시 냥이들과 바닥에 들어 누워 뒹굴다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쌀을 씻었다.



물을 자주 마시니 화장실에 자주 간다. 갱년기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물은 많이 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문제는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냥이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돌아가며 감시하기로 합의를 봤는지 매번 다른 아이를 만난다. 가끔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있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두 발로 서서 한 손으로 능숙하게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을 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면 무방비 상태로 꿈쩍꿈쩍 놀라는 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띤 얼굴을 보는 건 조금 치욕스럽다. 저들은 내 서열을 어디쯤 두고 있는 걸까… 정식으로 물어보고 싶지만 알면 불리할 거 같아 끝까지 함구할 생각이다. 며칠 전부터는 씻고 있는데 들어와 발매트 위에서 식빵을 굽는다. 나무꾼처럼 옷을 들고 달아나진 않지만 뭔가 모를 진심이 느껴져 애틋하기도 하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8rWtp6PBcQ/?igsh=MW04ZnZvdzhmajJ4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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