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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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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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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흐리다가 비

일러스트 : 백백허그 by 최집사



 본격적으로 비가 온다. 한동안 올 듯 말 듯 애를 먹이더니? 나의 기우제가 먹힌 걸까 시원하게 내리고 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지만, 비 오기 직전의 날씨보단 좋아한다. 창문을 꽁꽁 닫고, 여기저기 초를 밝히고, 뽀송뽀송한 육신으로 빗소리를 듣는 걸 좋아한다. 이불 뒤집어쓰고 스릴러 영화 보는 것처럼 무사하고 무탈한 현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이럴 줄 알고 반려인을 데리고 가 미리 장을 봐 두었지. 복숭아, 바나나, 참외, 애플수박… 찹쌀떡과 수수경단도 잊지 않았다. 씨리(아이폰 AI)는 한동안 비가 더 올 거라고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지만 벙커?에 식량이 차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지난 목요일엔 병원에 다녀왔다. 진전 없는 전공의 파업과 늦은 예약 시간으로 대기가 길어질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컥하지 말고,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역시나 3시 반에 예약되었던 진료는 3시에 접수했음에도 5시가 다되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자연히 여기저기 붙여진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전산 시스템 도입으로 당연히 늦어질 거라고 했다. 이러다 주사실까지 마감할 거 같아 문의하니 진료는 못할 수도 있다고 원한다면 처방을 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교수님은 뵙지 못했고 검사결과만 전달받았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다들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주신 분들이고, 한편으론 다 같이 겪는 불편이니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불안이 앞서 인상만 쓰게 된다. 어느 쪽이 되었든 몇몇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희생을 감수하는 건 엄한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편을 나눠지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진다고 믿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급함을 내려놓고 평정심을 갖는 것. 하루빨리 함께 웃으며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주말 저녁 반려인이 신이 나서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내 친구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이 시간엔 만난 기록이 없지만,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싱글이라 좀 더 자유롭게 사는 거 같다. 나도 집안일에 육묘에 아프고 나니 이제 사람 만나는 에너지도 많이 줄었다. 모든 상황은 상대적이고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할 순 없다는 걸 이제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놓인 처지에 따라 다양한 희로애락이 존재하니 비교하기 시작하면 마음만 고달파진다.



그에겐 잘 다녀오라고 말한 뒤 낮에 카페에서 사 온 토마토 치아바타를 꺼냈다. 바나나도 썰고 복숭아도 꺼내 요거트 위에 올렸다. 그러곤 유튜브로 베를린 영상을 틀어놓고 여행자처럼 홀로 저녁을 즐겼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씻을 땐 조금 무서워 만화 주제곡을 흥얼거렸다. 다행히 어디선가 작은 냥이 나타나 지켜봐 주었다. 보답으로 사냥 놀이도 했다. 아이는 꽤 만족하는 시그널을 보냈고,  덩달아 자존감이 조금 상승되었다. 은퇴한 중년처럼 소파에 파묻혀 아껴둔 드라마 시리즈도 봤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나 스토리 전개가 빨라 놓친 부분은 정성스럽게 되돌려보며 천천히 나만의 속도를 즐겼다. 그렇게 모처럼 쓸쓸하고 황홀한 주말의 밤을 만끽할 수 있었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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