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20대 후반,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당시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학자금 상환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기이라 목적이 분명한 학습이었다. 회사로 가는 버스는 원치 않는 옆 동네 투어까지 시켜줬는데, 당시 버스비가 950원쯤 되었으니 자전거를 타면 한 달에 5만 원 안 되는 돈을 아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편의점에 들러 우유 하나와 초코바를 사 먹었다. 7시 반 출근 7시 반 퇴근, 하루 12시간 회사에 묶여있던 몸이었고, 눈 뜨면 나가서 해지면 들어왔다. 벼르고 있던 일요일이 되면 온몸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애원을 했다.
처음 자전거를 타기 위해 공공자전거를 빌려 인적 드문 공원에 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타조처럼 푸닥거리다 펭귄처럼 꼬구라졌다. 그래도 처음 타게 되었을 때 꽤나 기뻤던 거 같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굴렸던 페달은 조금씩 나를 나아가게 했고, 현무암 같던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환희 같은 걸 느꼈다. 오롯이 자신의 감각과 동력으로 나아가는 기쁨은 영화 속 주인공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소리쳐주는 거 같았다.
겨우 탈 수 있게 되었지만 쉽사리 실력은 늘진 않았다. 출근길에 만취한 사람처럼 정체 모를 그루브로 자전거를 탔다. 아니 끌려 다녔다. 당시 함께 일하던 사원이 대놓고 못 탄다고 면박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몇 날며칠 사이트를 뒤져 자전거를 구입했다. 그렇게 요술봉 같고 슈퍼보드 같은 씽씽이가 나에게로 왔다.
쇼핑몰 사진처럼 출근길 슬랙스에 재킷을 입고 자전거를 탔다. 살면서 유럽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 없지만 내가 사는 동네가 파리다 최면을 걸고 퇴근길엔 동네 빵집에 들러 바게트를 사 오기도 했다. 여전히 상환해야 할 학자금은 구만리였지만 열심히 페달을 굴리다 보면 완납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한 희망도 품게 되었다.
2년 전 암에 걸리곤 한동안 외출을 할 수 없었다. 그전에 코로나까지 있었으니 실제로 나의 격리 기간은 5년 가까이나 된다.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항암 중이라도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밤마다 복도에 있던 실내 자전거를 병실로 끌고 와 족히 100년은 산 거북이처럼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스마트폰 거치대에 폰을 올려놓고 먼 나라 이웃나라, 세계테마여행 같은 걸 보며 언젠가 그곳으로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자전거로 인해 고된 나의 청년기는 아름답게 기억되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 한다는 건, 관계에 애정이 생기고 비로소 신뢰가 형성된다는 뜻이다. 그는 흙탕물에서 빠진 나를 끄집어낸 존재였다. 그리곤 스스로를 구하는 법을 조용히 알려 주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이젠 집에서도 밖에서도 자전거를 탄다. 저녁이면 밥을 먹고 예능을 보며 실내 사이클을 굴리고 공원이나 도서관, 시장에 갈 때도 반려견처럼 데리고 나간다. 칠흑 같던 나의 암흑기, 지팡이가 되어준 자전거가 있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일상의 균형과 인내를 알려준 소중한 친구이자 스승이며 나의 청춘을 빛나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