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 비, 우박, 바람
* 1690일째 드로잉 : 보통의 가족. 16
- 기온이 뚝, 여기저기 눈소식이 들렸다. 아침에 친구와 집을 나설 땐 비가 내렸는데 가는 도중 우박으로 바뀌더니 개였다, 흐려졌다를 반복했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우리의 마음도 20년 전처럼 들썩거렸다.
- 사춘기 날씨 따윈 갱년기 아줌마들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친구가 찜해둔 인생 깍두기집에 들러 갈비탕을 뚝딱하고 소품샵들과 서점을 차례로 도장 깨기 한 후 한적한 카페로 들어갔다. 비눗방울 같은 콧바람을 퐁퐁 풍기는 현지 강아지와 격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말차 미숫가루를 주문해 창가 자리로 갔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납작 누웠다 벌떡 일어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설렁설렁 우리들의 시간들을 이어나갔다.
- 집으로 돌아와 반려인에게 전화를 하니 설거지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친구네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 복작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지금쯤 사타구니와 머리맡에 있어야 할 냥이들을 떠올랐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영통을 했는데 꾸리와 룽지가 냐옹냐옹 나를 찾았다. 마침 필드 나가는 중이었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돌아가면 간식도 챙겨주고 잘 놀아줘야지… 전화를 끊고 나니 어김없이 간사하고 뻔뻔한 마음들이 떠올랐다.
- 새벽 2:30, 창밖 바람소리에 잠에서 깼다. 제주는 하루아침에 급랭모드로 꽁꽁 얼어버렸다.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여기저기 비행기들의 결항 소식이 들렸다. 난생처음 제주 눈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설렘과, 동시에 오늘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나 봐야 알고, 때가 되어야 보이는 것들이었다. 어찌어찌 되겠지 하쿠나마타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번에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해녀가 숨을 참고 소라를 캐듯,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숨겨진 가장 밝은 빛을 찾아다니는 꿈을 꿨다.
- 오늘의 할 일 : 마지막날의 제주를 마음껏 즐기기.
* 뽀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