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40226
< 지구의 기분 >
잠들기 전 냥이들과 이불 속에서 꽁냥 거리는 시간을 좋아한다. 알맞게 예열된 온기에 피로의 각질을 녹이며, 타코야키처럼 타지 않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루치 노고를 보상받는 순간이다. 집장인 상시 근무자로 안방 싱글침대 한 칸만큼은 오롯이 나의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두 냥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의 온기는 오히려 큰 의지가 된다. 20년도 넘은 이 아파트에 산지도 11년 차가 되었다. 한 여름에 맨탈 털리는 정전도 몇 번 당하고, 드라마에서 보던 천장 누수도 두어 번 겪었다. 돌아보면 유구한 역사요, 소중한 이벤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모래 위에 옮겨 심어 진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변덕스러운 계절 몇 번 겪고 나니 수염 같던 잔뿌리도 단단히 자리 잡았다. 벽지의 손때와 유리창의 묵은 얼룩, 닳아서 색이 바랜 장판 모서리… 주름진 할미 손을 만지듯 눈가는 곳마다 고소한 추억들이 쌓여있다. 내 것이 아니라는 단념은 작은 희망에도 기대어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이런저런 걱정 대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농후하게 살아내는 법을 배웠다. 번데기는 껍질에 집착하지 않고, 민달팽이는 맨몸으로 비를 맞는다. 더 큰 둥지를 탐하지 않는다는 마음은 소유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자유라는 걸 깨달았다.
< 작업 일지 >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외할머니께서는 주머니 부자셨다. 저고리며 바지며 은밀한 속고쟁이까지 자투리천을 네모 반듯하게 잘라 시크릿 포켓을 만들어 붙이시는 게 취미셨다. 그 도라에몽 주머니에선 종종 진주 같은 사탕이 톡톡 튀어나왔다. 이러니 말도 배우기 전인 손녀는 그 주머니만 바라보고 살았다. 세상 모든 존재에겐 저마다의 공간이 필요하다. 새에게는 나무, 고양이에게는 숨숨집, 캥거루에겐 아기 주머니… 책에는 북커버, 동전에겐 지갑, 안경에겐 안경집이 필요하다. 누구나 이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빼길 수 있다는 불안은 뺏으려는 마음이 되어 전쟁과 침략의 이유가 된다. 더 큰 시공간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점점 더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주말을 보내며 전쟁 소식을 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누군가의 작고 소중한 집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무에 새집을 달고 골목에 길냥이 집을 설치하는 건 결국 스스로를 지키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북커버를 만들었다. 헌 옷의 디테일을 활용해 주머니를 만들고 앙증맞은 북마크도 손바느질로 달아주었다. 책 속의 감동과 다이어리 속 추억들을 고스란히 지켜주는 포켓 요정들. 할머니의 알사탕만큼 호감가는 비주얼이다.
어릴 적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이 있었다. 물론 열쇠가 없이도 누구나 얼마든지 열 수 있는 노트였다. 그곳에 아무도 읽지 않길 바라며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들을 써내려 갔다. 아마 무해한 타인에게 쓰는 편지라 생각하며 털어놓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