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처음 그애는 그냥 친구였지.
남자라고해서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건 아니였어
어릴적 다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이였으니까.
내가 또 워낙에 이성이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함께 술마시고 떠들던
친구년들이 하나둘 시집을 가버리더라.
마지막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던 날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어.
여자들중에선 나 혼자 남았거든.
웬지 모를 배신감도 들고
그게 왜 남탓할 일이냐.
내가 스스로 연애를 거부한 걸.
그런 생각도 들더라.
전에 형부가 소개해준 사람 생각도 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30대 중반이 지났어.
주변에선 시집못가서 어쩌냐고들 난리였지.
30대 중반에 결혼한 사촌언니가 그러더라.
너 그렇게 여유부리다가 후회한다고.
에이. 설마. 내가 언니처럼 되겠어?
하고 웃어넘겼는데
이제 그언니 얼굴보면 민망해서 멋쩍게 웃는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여유를 부린건지
운명의 남자를 기다린건지
(이건 좀 아닌거 같긴해)
그렇다고 딱히 연애를 거부한건 아닌데
지금 내 옆에 남자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만 존재하게 된 거지.
그래서 보다 적극적으로 만나보려고 노력해봤어.
선부터 시작해서 소개팅이니 무슨 사이트니...
막상 만나려고 결심하니
희안하게 또 안만나지더라.
나땜에 울고불고 난리친
괜찮은 남자들도 많았는데
그때 무심하게 대했던 내가 미친년이지...
나도 내 주제정도는 파악하는지라
크게 까다롭지 않으려고 하는데
인연이란게 그렇게 쉽게 만나지지 않더라고.
그러다 40대가 찾아왔어.
와... 진짜 기분이 묘해지더라.
어느 날 형부가 그러더라.
그냥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행복이 반드시 결혼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만의 행복을 찾아 살라고.
그래. 그말이 맞아.
왜 굳이 결혼을 하려고
아등바등 애쓰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결혼을 위해 내세울 나이도 아니고...
(나이 때문에 거절당한 적도 많으니까)
그냥 편하게 포기하고
여행다니면서 앞으로 살아갈 삶에
더 집중하자 라는 쪽으로 결심을 했어.
그랬는데...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는데...
어느 날 그녀석이 나타난거야.
그래. 그녀석.
그러니까 찬란했던 내 20대 시절에
함께 어울려 놀았던 남자사람친구 말이지.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보니
내가 술먹고 정신을 못차릴 때
나를 업고 그녀석이 우리집까지
데려다주었던 적이 있어.
엄마도 알고 있더라고.
그때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날 업고 있던 낮선 남자를 봤으니까.
그 때 이후로 주변 친구들이
그녀석과 나를 엮을려고 무던히 노력했었지.
하지만 그땐 왠지 그녀석이 싫었어.
그냥 이상하게 정이 잘 안가더라고.
집에 데려다 준건 고마웠지만. ㅎㅎ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각자의 삶에 쫒기다가
다시금 만나게 된 거란 말이지.
대충 들어보니 친구녀석들이
어찌어찌해서 그녀석과 연락해
연결해주려고 애썼나보더라.
뭐 나는 그냥 모르는척 시치미를 뗐지만
그렇게 다시만난 그녀석은
꽤...라고 하긴 그렇지만
나름 괜찮은 남자가 되어 있었어.
그렇게 둘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
강남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고 있다는데
나름 잘되나봐.
꽤 바쁘게 운영되고 그러다보니
본인도 연애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하네.
흠흠... 그래. 그렇구나.
그때까지만해도 그냥 그랬어.
여전히 남자사람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눴지.
남자랑 단 둘이 앉아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눠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시간은 하염없이 지나 밤은 깊어갔고
밀려둔 숙제를 몰아치우듯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이어갔어.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날
뜬금없이 집까지 바래다준다며
우리집 아파트까지 같이 걷게 됐어.
늦은 시간이라 인적도 없고
우리 둘의 목소리만
주변 공기를 울리며 퍼져나가고 있었지.
아파트 입구즈음에 도착했을 때
이제 잘가라고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뇌에서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이였어.
나... 너 좋아하면 안될까?
갑자기 시공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었어.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알긴 알았거든. 언젠가 이 녀석이
그 말을 하겠구나 하고...
글찮아. 이제 나이도 서로 있고 하니
이정도 만날꺼면 그런 가정은
서로 말 안해도 하고 만나는 거지.
근데 막상 닥치고보니
정신이 아득해지는거야.
주변의 소음들이 분명 들리는데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는거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진지한 얼굴에
나 역시 시선을 고정시키긴 했는데
그렇다고 달리 눈을 돌리기도 그렇잖아.
아... 그래. 왔어. 왔다고.
뭐라 대답을 좀 해야되는데..
아... 근데... 어...
입이 살짝 벌어진채
얼이 빠진 것마냥 굳어버렸어.
챙피하게. 이럴줄 알았으면
제대로 연애라도 해볼걸.
그 때 나한테 대쉬하던 남자들의 고백
진지하게 받아들여볼걸.
이게 뭐야. 뭐냐구... 씨..
고민은 길게 할 순 없었어.
10여초 정도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고
그중 5초는 고백으로 인한 충격을 받아냈고
나머지 5초 동안에 대답을 해야만 했어.
사실 고민하고 자시고도 없잖아.
그동안 어중이떠중이 만났던 사람들 생각하면
답은 분명한거지.
근데 그 답이 그런 단순비교에 의해
내 입에서 나오게 됐다면
뭔가 찜찜함을 털어내기 힘들었을 꺼야.
근데 희안하게도
그녀석의 그 말에...
내 심장이 요동치더라.
갑작스레 펌프질 하는 심장으로 인해
뇌로 피가 쑥쑥 들어간 덕인지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어.
수줍은 미소가 지어지더군.
잠시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다
다시금 그녀석의 눈을 쳐다보았어.
그리고 나도 모르게
더 벌어진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떡였어.
그녀석은 나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지.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더라.
자려고 누웠는데 그녀석이 카톡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더라.
고맙긴... 그럼 나도 고맙지.
늦었지만 이렇게 날 찾아와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정말 고맙지...
그렇게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어.
이젠 그냥 포기하고 살기로 결심했는데...
그랬는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사랑이 오더라.
그냥 남자사람 친구였던 그 녀석이
이렇게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사람일줄은
꿈에도 몰랐었어.
그애와 대화하면서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애교도 발견했어. 참 웃기더라구.
결혼을 하게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하게 되겠지?
이제는 그냥 마음이 편해.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는 거...
언제든 나와 함께 있어줄 수 있다는 거...
늘 집에 바래다주는 그녀석의 배려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결혼이란 과정을 앞두고
서로 해결해야될 많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잘 해나갈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이 길이
늘 꽃길만 계속되진 않더라도
함께 잡은 두 손을 놓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으면 해.
너와 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이
우리에게 더 나은 행복을 가져다주길 소망해본다.
늦게라도 만나게되서 감사해.
그리고 고마워.
사랑해. 남자사람친구.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