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a Feb 11. 2021

왜 이렇게 되었을까?

수업시간. 서양미술의 이해를 듣고 있던 나와 내 친구 앞 스크린에 교수님이 띄운 18세기 여성 누드화가 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친구는 그 누드화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말했다. 


- 뚱뚱해. 보기 싫어.


 분명 그 누드화의 여성은 당대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을텐데 21세기를 사는 친구의 눈에는 혐오스러운 뚱뚱이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통통한 몸보다 마른 몸매를 선호하게 된 시작은 1930년대였다고 한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마르그리트가 1922년 발표한 <가르송>이라는 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패션계는 가르송 룩을 선보였다. 프랑스어 가르송은 소년이라는 뜻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짧은 재킷, 셔츠, 넥타이 등 남자들이 즐겨 입는 복장을 하고 있어 그 당시에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여성들의 상징이 되었다. 가르송 룩은 짧은 보보 헤어스타일, 밋밋한 가슴, 짧은 스커트, 직선적 실루엣의 테일러 슈트와 드레스를 특징으로 한다.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밋밋한 가슴, 직선적 실루엣을 가지려면 마르는 수밖에 없다. 남성처럼 짧은 머리 스타일에 활달한 복장을 한 여성 스타일은 당대의 유행이 되었고 1970년~80년대에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이전에는 여자는 결혼을 하면 바로 해고됐다. 공장에서는 계속해서 여자들을 고용했지만 보통은 적은 임금을 지급했고, 그래서 조합원들은 여자들을 남자들의 생계를 좀먹는 노동자로 취급했다. 사실 많이 완화되어서 그렇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2005년에 나타샤 월터스는 여자들 평균 월급이 남자의 85%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자들이 일반 공장과 군수품 공장에 고용되어 경제 일꾼으로 일했던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여자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여자들의 일상은 집안일을 하는 것이었다. 성차별은 예사로 일어났고 산아제한도 없었으며 정식 일자리는 극히 적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환경 속에 갇혀 있었다. 


1930년대 2세대 페미니즘은 이 모든 상황을 바꿔놓았다. 여자들은 직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1930년에는 여성이 노동인구의 25%를 차지했다는 통계도 있다. 2세대 페미니즘의 이면에 깔린 사상과 양성평등을 위한 법률 제정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남녀의 모든 차이는 불공평한 관습 때문에 만들어졌고 따라서 모든 상황이 공평해진다면 그러한 차이를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겨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시간, 같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함께 패션도 그 궤를 같이 했다. 남성과 같은 신체를 가지면 같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시작은 순수하게 여성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마르기를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틀린 가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여성보다 남성의 노동 인구가 더 많고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 승진에서도 '유리 천장'이 작용해 여자들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그렇게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여자들이 마르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자본주의가 양산해 내는 문화의 독특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현상이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스며들어 마치 내가 주체적으로 어떤 것을 실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그 행동을 하는 이유가 행동이 긍정적이고 옳다고 생각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들 자기의 상태를 불편하게 느낀다고 해서 항상 저항하거나 고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바꾸거나 다른 것과 이익을 잰 후에 더 편하고 편익이 큰 쪽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 같이 일상에서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를 생산하는 사람이 꼭 자신이 몸담고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친구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 꺼려한다. 하지만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육아와 가사의 불평등에는 굉장히 불만이 많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단지 그 시나리오를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시장에서 팔리지 않기때문이다. 


자신이 써내려 가는 자신의 모습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본인이 하는 생각이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친구가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 수 도 있다는 뜻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앞으로 친구는 치킨을 자주 먹기 힘들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친구는 치킨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고, 찬물로 샤워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이유가 여자들이 마르려는 특성이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 시작된 익숙한 것은 잘 바뀌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변형되어 그 상태가 더 발전할 뿐이다. 우리는 여성에게 마른 몸을 원하는 많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냥 행동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제들, 또 다른 나와 같은 아이들의 고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