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서점에서 눈에 띄는 오렌지색 책을 발견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몇 번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분명, 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강의 책을 읽어본 적 없는 나는 프랑스 작가라는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
지루하겠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인 말들만 늘어놓겠지.
그런데 자꾸만 첫 문단이 떠올라서 집에 돌아온 나는 결국 이 책을 사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돌연한 세찬 바람이 방안에 스며들었다.
커튼이 돛처럼 나부끼고, 커다란 화병의 꽃들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이젠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 봄바람이었다. 첫 봄바람.
희붐한 새벽에 나무 냄새, 숲 냄새, 흙냄새를 풍기는 바람...
-패배의 신호 중 p.18
돛처럼 나부끼는 하얀색 시폰 소재의 커튼과 햇살이 통과되는 커다란 유리화병에 무심하게 꽃아 둔 화사한 꽃다발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에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
나른하고 평화롭다.
나는 이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결국 책을 집어 들었다.
예상대로 살짝 지루해지려는 순간.
남자주인공의 어떤 하나의 행동 혹은 생각이 나의 호기심을 다시 잡아끌었다.
(나에게 남자주인공은 앙투안이 아니라 이 남자, 샤를이다)
루실은 컨버터블을 과속으로 달리고 있으리라. 그가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매우 견고한 차였다.
자동차 격주간지 오토 주르날에 근무하는 친구들 중 한 명에게 전화하여, 내구성이며 주행성 등이 가장 뛰어나 스포츠카가 무엇인지 문의했었다. 루실한테는 그저 제일 구하기 쉬운 차였다고만 말하며, 전날 아무렇게나 '경쾌하게' 주문한 척했다.
-p.25
여기에 이 남자, 샤를에 대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고 느꼈다.
루실, 너는 이런 남자를 버리고 떠난다면 정말 바보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없이 행복한 남자
-p135
사랑하는 여자 루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저 행복하기만 한 남자, 샤를.
하지만 결국 루실은 떠난다.
앙투안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어리석고 바보 같으니라고.
이별을 고하는 루실에게 샤를은 말한다.
알고 있었다고.
그는 결코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지 않는 남자였다. (p.178)
그러니까, 루실, 언젠가 나한테 돌아와요. 난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해, 앙투안은 자기 짝으로서 당신을 사랑하지.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은 걸 거고, 그 나이엔 그게 맞아. 하지만 난 당신이 나와 무관하게 행복하길 바라오. 기다리겠소,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
게다가 앙투안은 머지않아 당신이 당신인 걸로, 그러니까 당신이 향락적이고 무사태평하고 비겁한 걸로 나무랄 거요, 아니면 벌써 나무랐을지도 모르고. 틀림없이 그가 당신의 약점 혹은 결점이라고 부를 것들에 대해 당신을 지탄할 거란 말이지. 그는 여자를 힘 있게 만드는 게 뭔지 아직 모르거든. 남자들이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
이제 앙투안한테 가서 내 말을 전해요. 당신을 아프게 한다거나, 한 달 뒤가 됐든 삼 년 뒤가 됐든 당신을 행복하고 까딱없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나한테 돌려주지 않으면, 다른 말이 필요 없이 내가 그냥 그를 으스러뜨릴 거라고 말이오.
당신을 붙잡진 않겠소. 소용없을 테니까, 그렇지? 그러니 이거 하나만 기억해요. 내가 당신을 기다린다는 거.
언제든, 어떤 이유에서든, 당신이 내가 필요하다고만 하면 내가 있을 거요.
(p.179/180)
나는 이 과묵하고 사려 깊은 남자가 이별을 고하는 여자 앞에서 처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루실의 어리석음과 충동적인 젊음을 안타까워했다.
봄에 그를 떠난 루실은 여름과 가을을 앙투안과 함께 보내며 서서히 시들어갔다.
앙투안은 자신의 틀에 루실을 맞추려고 했다.
그는 결코 루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루실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루실... 넌 나한테 아무 믿음이 없니?
-p.222
그는 철저히 절망했다.
-p.223
앙투안, 너는 루실같은 여자를 품을 수 있는 남자가 아니야.
루실, 너는 너의 그 자유로움, 권태로움, 결핍과 자유를 끝없이 펼칠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해.
결코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지 않는 그런 남자를.
"왜 날 아직도 사랑하죠? 왜?"
루실은 거의 원망을 담아, 아프게 물었다.
"글쎼, 나도 잘 모르겠소. (중략) 알다시피 사람들은 늘 사느라 바쁜데, 당신은 당신 때문에 바쁘단 말이지. 대충 그렇소, 설명을 잘 못하겠어. 레몬 소르베 들겠소?"
레몬 소르베, 나도 먹고 싶어진다.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만 같았던 소설 <패배의 신호>를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렸다.
그리고 묻고 싶어 졌다.
샤를,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