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시와 재회
조식을 먹고 느긋하게 준비를 마친 우리는 전주의 독립서점 카프카를 찾아갔다.
인터넷 검색 중 알게 된 곳이었다.
정오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뜨거워진 거리를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간다.
한산한 골목 안, 초록색 덩굴로 뒤덮인 서점 겸 카페 카프카.
입구부터 올라가는 계단까지, 마음에 든다.
커피를 주문하고 책들을 구경하느라 한참을 보냈다.
자리에 가 앉았을 때, 커피는 이미 식어있었지만 상관없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에세이 <비평가의 책 읽기>와 기형도 시집 <잎 속의 검은 잎>을 샀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았지만, 가볍고 얇은 책으로 골랐다.
박물관에서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며 <언제라도 전주>라는 책을 한 권 더 샀다.
전주에 왔으니까 전주에 대한 책은 한 권 사야지 싶었다.
점심은 진미집이라는 유명한 소바집으로 결정.
뜨거운 태양아래에서도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나무 그늘 아래 나와 아이를 세워두고 남편이 땡볕 아래의 줄에 섰다.
양산이 없는 할머니 한 분이 남편 뒤에 줄을 서 계셨다.
남편이 그분과 함께 양산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차례가 됐다.
메밀 소바 역시, 양이 많다.
전주는 정말 인심이 좋은가 봐.
여기도 양이 많아.
맛도 좋은데 양까지 많아.
너무 배가 부르니까 소화도 시킬 겸 향교를 보러 가보자.
이글이글 타는 햇빛 아래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간다.
고요하고 뜨거운 향교.
배낭을 멘 외국인 관광객 두 명과 양산을 쓴 우리 세 사람.
그다음은...
전주에 시집만 파는 서점이 있대. 가보자.
나의 한 마디에 구글맵을 띄우는 남편.
그렇게 해서 찾아간 책방 <조림지>
조용히 앉아서 혹은 서서 시를 읽는 사람들이 있는 작고 소중한 공간.
나는 <카프카>에서 찾지 못한 시집 두 권을 샀다.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
그리고
임솔아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최승자의 시집은 매번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내 눈에 뜨인 건 사라는 뜻이겠지 싶어서 샀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은 처음엔 제목에 이끌려서 책장에서 뽑았고
목차를 훑어보다가 '개처럼'이란 제목의 시가 있길래 읽어보았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들어서 샀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개'를 좋아하나 보다.
최승자 시집에서도 '개 같은 가을이'라는 시가 좋았다.
기형도 전집에서 읽었던 '노마네 마을의 개'도 참 좋아했다.
조림지를 나와 객사길을 걸었다.
야키토리에 맥주 한 잔 하자.
그리고 저녁은 왱이 콩나물 국밥.
머리는 시로 가득 차고,
배는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찼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기형도 '오래된 서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