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삶의 처방전이 될 수 있을까
책장 앞을 어슬렁 거리다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있는 오래된 시집 두 권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까.
심지어 내가 산 책도 아닌, 친정집에 있던 책이 왜 지금 내 집 내 책장에 저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걸까.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두 권의 시집을 꺼냈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2>
그리고
<마주보기>라는 제목이 마주 써져 있는 정체불명의 시집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오래전 나는 책에다가 감히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쳤구나.
동그라미가 쳐진 시를 읽었다.
왜 나는 이 시에 동그라미를 그렸을까.
아침밥도 잊고 나는 시를 읽었다.
<마주보기>를 펼쳤다.
이번에는 차례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다.
가슴이 못내 답답할 때
감정이 메말라 수혈을 필요로 할 때
자신이 마구 흔들릴 때
갑자기 사는 일이 허망해졌을 때... 등등
슬며시 기억이 돌아온다.
맞아, 이 시집은 이런 거였지.
외국의 한 정신과의사가 쓴 시.
삶의 처방전이라는 소개글이 달린 시집.
마음이 이럴 땐 이런 시를...
뭐 때문에 사는 일이 허망해졌던 걸까.
가슴은 왜 답답했을까.
감정은 왜 메말랐던 걸까.
그러다가 발견한 유독 진한 동그라미 하나.
호화판으로 놀고 싶을 때.
하하, 이건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된다.
한 번 시끌벅적하게 놀아보고 싶었겠지.
나는 호화판으로 놀고 싶을 때 읽어보라고 쓴 시의 페이지를 펼쳤다.
제목은 <갑자기 난 결말>
그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상급 호텔에서
제일 비싼 술 최고의 음식을
먹고 마셨다.
그의 기분은 천당이었다.
먹고 마시며
웨이터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글라스를 높이 들고
축배했다.
(중략)
그는 돈을 뿌렸다.
계산서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호주머니의 지전을 꺼내 팽개치고
그는 호텔을 나왔다.
(중략)
그는 발을 멈추고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이젠 동전도 한푼 없었다.
꽃파는 소녀
펨프
견습접대원은
모르는 체 서 있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듯 둘러보았다.
모두들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그는 외투를 벗어
클로크 룸의 아가씨에게 던져 주고
호텔을 나왔다.
흐음...
호화판으로 놀면 빈털터리가 될 테니 하지 말라는 말인가.
놀고 난 뒤에 밀려올 허망함을 말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이런 시는 어렵다.
나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처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아침을 준비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