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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강국의 과거, 우키요에 미술관

2023년 12월 오사카 여행

by 차분한 초록색

사람들이 가득한 신사이바시 상점가 사이로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우키요에 미술관.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3층 정도의 높이로 놀랍게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 그냥 올라가지 말까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우키요에 미술관이라니.

아무도 없는 작은 미술관에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세명의 관광객이 쭈뼛쭈뼛 거리며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망설여진다.

게다가 아이가 우키요에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또 하나 걱정은 춘화라도 떡하니 걸려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계단을 올라가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미술관은 생각처럼 작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괜찮다.

두 눈에 꼭꼭 눌러 담으면 되니까.

미술관 직원이 아이에게 손짓한다.

일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걸 알고는 영어로 설명을 해준다.

아이에게 벽에 걸린 그림을 조심스레 들어 보여준다.

(관람객은 만질 수 없다)

미술관의 불빛을 받은 그림 속 검은 옷의 남자.

남자의 검은 옷에 불빛이 닿자 벽에 걸려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옷의 무늬가 드러난다.

아이가 신기해한다.


우키요에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나오고 있다.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본다.

남편이 말한다. “꼭 만화 같아”라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

지금 그린 만화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체와 색감이다.

문득, 일본이 만화강국이 된 건 이러한 그림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림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엿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본다.

눈 덮인 후지산을 본다.

눈 내리는 밤,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모습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기대 없이 찾아왔던 미술관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만화 같은 무사의 그림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만화책의 주인공 같은 모습.

옷을 갈아입히고 농구 코트에 세워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


우키요에는 바람에 떠다니듯 오랜 시간을 흘러 흘러 지금 우리의 눈에 까지 와닿는다.


끝없는 쇼핑의 행렬을 따라가다 살짝 벗어난 곳에 오래전 이야기를 품은 그림들이 숨어있다.

쇼핑의 틈새에 정신적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곳을 숨겨둔다.

마치 요새와 같이.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념품 코너에는 요괴에 대한 책들이 많았다.

당시 우키요에에 요괴그림이 많았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요괴 서적들을 보고 있자니, 탐이 났다.

하지만 왠지 요괴 그림이 잔뜩 그려진 책을 사면 요괴의 혼이 나에게 붙어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게 아닐까 하는 만화적 상상력 때문에 나는 그만 구입을 포기해 버린다.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기념품 코너에 있는 다양한 요괴 책들 중 한 권을 꼭 사오리라 마음먹는다.

혹시 그곳은 우키요에 미술관으로 위장한 요괴들의 집이 아니었을까.

밤이 되면 책 속에서 요괴들이 나와 우키요에 그림 속 인물들과 담소를 나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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