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팍한 재주로 기고만장해지기는
한참 내 안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던 때에,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쓰고 거의 매일 세 시간씩 글을 썼다.
소설이라는 걸 처음 써보았다.
그냥 무작정 썼다.
하면 될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들떴다.
쓴 글을 읽어보고 수정하고 그 과정에 혼자 신나 했다.
2년마다 열리는 동서문학 공모전에 처음 쓴 단편 소설을 응모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내심 기대도 했다.
<흔해빠진 사랑>이라는 제목의 단막극 대본을 썼었다.
글쓰기를 배워본 적 없는 나는,
뜬금없이 드라마 대본을 써보겠다는 생각으로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에 등록했다.
면접을 거쳐 기초반에 등록을 했고, 그다음반인 연수반에 올라가 두 번째로 쓴 대본이
<흔해빠진 사랑>이었다.
그때 연수반 선생님이 “제목이 좋다”라고 말해 주셨다.
그 말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제목 짓는 게 늘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부 다 오래전 일이다.
퇴근 후, 여의도에 있는 교육원으로 달려가 대본에 대해 배우고 서로의 글을 합평했다.
수업이 끝나면 근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몇 편의 대본을 썼고, 몇 번의 공모전에서 낙방을 했다.
와중에 아이가 생겼고, 엄마가 되었다.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느라 방치되었던 꿈과 마주쳤다.
다시 희망을 품었고, 매일 글을 썼다.
동서문학상 공모전 기사를 보고 “제목이 좋다”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에 맞는 내용을 써보리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쓰고 거의 매일 세 시간씩 글을 썼다.
내 안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흔해빠진 사랑>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완성했다.
결과는 맥심상이었다.
가능성은 있으니 계속해서 열심히 써보라는 의미로 주는 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가장 낮은 상이었지만 내 이름이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마치 이제 진짜 작가가 된 것 같았다.
처음 작가교육원 기초반에 등록할 때도
누군가는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는데,
한 번에 붙다니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었다.
기초반에서 연수반으로 올라갈 때도, 연수반에서 전문반으로 올라갈 때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대단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매번 공모전에 떨어지고,
우습게도 점점 기고만장해졌다.
맥심상 이후 나는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쓰고 몇 번의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어쩌다 한 번 운이 좋았던 걸로 잘난 척 하기는.
나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흔해빠진 글이나 쓰는 주제에.
나는 쉽게 포기해 버렸다.
그저 그런 얄팍한 재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잔재주나 부리는 정도로 겁도 없이 까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오래된 일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 보면 엉뚱하게도 전혀 생각지 못한 책을 빌리게 되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랬다.
어떤 책을 읽게 된다는 건, 그래서 감동을 받는다는 건
그 책과 내가 인연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선택하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날, 도서관에서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나를 선택했다.
도서관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책은 하루키의 목소리를 빌려서 내게 말해 주었다.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187
"당신이 (안타깝지만) 희유의 천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정비하고 유지할 것 -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200
무엇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난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
천재도 아니면서 얄팍한 재주로 글 몇 편 끄적거려 놓고는 안된다고 징징거리다니.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글귀가 마음을 때렸다.
포기하지 못하는 건 미련하기 때문일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몰라, 모르겠지만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거 같아.’라고 말하게 되었다.
하루키 씨의 말을 빌려 써 본다.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씁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거 같기 때문입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