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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분한 초록색 Jun 27. 2024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내가 두고 온 유실물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첫 장부터 꼼꼼히 읽지 않고, 띄엄띄엄 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 순간 조금 딴지가 걸고 싶어지기도 한다.


100가지 유실물 중에는 '지루함'도 있고, 'LP판'도 있다.

그렇지. 요즘은 지루할 틈이 사라졌지. 

약속 장소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 병원이나 은행(요즘은 은행에 갈 일도 사라졌지만)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지루함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지루함과 함께 '생각'도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잃어버린 생각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긍정적인 무관심'에 대해.



막대사탕과 롤러스케이트가 유행하던 시절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아주 잘 맞았다. 학교에 갈 때는 혼자서 또는 엄마가 못마땅해하는 아이와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각자 자전거를 타고 교통체증에 맞춰 함께 달렸을 수도 있다. 엄마는 알 필요가 없었다. 낮에 집이 비어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은 마음대로 오후 시간을 보냈다. 낮에 부모님이 집에 있는 아이들도 보통 저녁 식사 전까지는 행방을 알리지 않았다. (중략) 어떤 아이들은 시내에서 물건을 훔쳤고 학교 주차장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탔다. (중략) 당신이 집에 도착했을 즈음이면 부모님은 주무시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아이들은 자랐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이러한 일상적인 육아 관행은 이제 심각한 태만 행위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긍정적인 무관심>中 p.59/60



이게 어째서 '긍정적인' 무관심일까.

나는 그저 먹고살기 바빠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을 기력마저 소진한 부모의 모습이 보일 뿐인데.


휴대폰을 쥐어주고 그것으로 아이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요즘 부모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욱더 깊은 인터넷 세상 속으로 숨어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아이들이 자라던 그 시절이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나도 가끔 아이에게 이제는 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꼬불꼬불한 선을 길게 쭉 늘어 당겨 받던 다이얼 전화기에 대해, 카세트테이프에 대해. 

밤에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대해. 커다란 LP판과 CD, 그리고 플로피디스켓에 대해.

아이에게 공기놀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공기놀이도 고무줄놀이도 하지 않는 듯하다. 할 시간이 없어서일까)


어느 날인가 아이가 말했다.

엄마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고. 그 시절에 엄마가 뭘 하면서 놀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그때가 뭔가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은 때라고 얘기해 준다.

학교에서 학생을 때리는 일도 없고, 촌지를 바라는 일도 없으니까.


지금이 훨씬 더 좋은 때라고 말하는 건 내가 어른의 시선으로 지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 걸까.

문득, 내가 두고 온 유실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커버이미지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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