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신 없는 편지 어쩌면 독백

- 여든의 시간

by elliott



네모 반듯한 단조로운 책상에 앉아있다.

무엇으로 서두를 시작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늘 푹신한 소파와 이불에 싸여있다 처음 바깥으로 나온 듯 책상과 의자의 딱딱한 감촉이 낯설다. 어느 순간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게 마냥 아무도 모를 끝을 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든의 어느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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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몸이 곱아간다. 인간의 의지가 가장 강렬했던 때에는 곱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힘없는 노인이 되니 자연스레 뭉그러지는구나. 한낮 마음 따위가 뭐가 대수라고 그리도 뻗대었는지 모른다.

이토록 자연스레 바닥에 흐물거리며 차갑게 식어갈 것을. 왜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드러낼 따위야 아무 의미가 없단 것을 어느 나이엔가 알아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젊음의 생기는 마음으론 여전히 생생 하다마는,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으니 나는 이리도 곱아졌다.

여든. 여든이라.. 참, 많은 것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이렇게 앉아구나.

이젠 푹신한 의자가 아니라면 오래 앉아 있지 못할 나이가 되었어.


마른 몸은 이제 뼈와 거죽이 붙어버린 듯 앙상하고 마른 나뭇가지와 같고 얼굴은 움푹 패이고 갈라진 나무기둥의 거친 표면 같다. 주름의 골이 얼굴을 덮은 지 오래라 거울을 더 이상은 보질 않아. 곱게 단장을 하고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려 애를 쓸 나이가 지난 지 언제인지 모르겠다.

네 엄마는 언제나 지나가는 말로 '세월이 무심해'라는 소릴 버릇처럼 지겹게도 했는데, 실로 무심한 것이지. 세월 이란 거 말이다. 지나오니 알겠더구나. 나이 든 노인네가 기억하는 삶이란 내가 나로 기억하고 싶은 청춘의 어느 순간뿐이란 것을. 나이가 들며 망각하는 것은 모두 그 이후의 것들이지. 아무리 힘이 들었던 때라도 늙은 외형의 삶보다 그때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단다. 나이 듦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 마음은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이겠지. 나이가 드는 것이 몸이지, 마음이 아니다. 언제나 머릿속의 상념은 시간이 흐르고 진짜 어른이 되었을 때. 인생이라는 것의 의미를 번쩍하고 알아버렸을 때. 그때에 머물러있어. 나이가 들어가는 이후의 삶이 절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어른이 되기로 마음먹은 후엔 막연한 믿음이란 게 생긴 것이지. 나는 계속 나일 것이라는 믿음. 흐르고 흘러가는 것은 세월이고, 어른인 내가 더 어른이 될 수는 없다는 믿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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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심한 세월 속에 녹아들어 살아간다. 삶이 네 마음과 방향을 같이하면 좋겠다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 어느 순간, 다들 그렇게 젊음이란 것을 마음 한구석에 쟁여두고 마치 봄과도 같았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살아간다. 지난 시간이 아무리 힘이 들었더래도, 결국은 지금 너의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리라 생각되는구나. 지난 것은 되돌릴 수 없으니, 그러니 그 순간들을 조금은 더 소중하게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때의 내가 조금 더 삶이란 것을 소중히 다루었다면, 또 순간의 선택들에 작은 망설임들을 빨리 지워냈다면 조금은 빨리 봄을 맞이했지 않겠니.


한번 무너졌다. 라 여긴 삶을 다시 걷는 일이 새삼 어렵단 것을 알았던 때.

혹시 폭풍우가 한차례 지나고 난 후의 고요를 알고 있니. 그것은 삶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이란다. 작은 바람이, 흐릿한 하늘이, 주변에 스러진 잔재들을 치워낼 일이, 그 막막함들이 그 고요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사람을 주저하게 만들지. 서른, 그 해의 나는 그런 고요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구나. 아마도 그즈음의 나에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큰 선택이 주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꼭 봄이 올 것만 같은 볕을 내려놓곤 계속해서 추운 날이 이어졌지. 어떤 시간을 지날는지 모를 그 깜깜한 밤의 고요 속에 나는 마냥 주저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분명 힘이 들었다. 울었고, 또 울었지. 계속 마른다고 생각했었어. 마음이 메말라갔지. 마음에 형태가 있다면 그 꼴이 꼭 지금의 나와 같게. 어쩌면 지금 내 모습보다 더. 그때의 나로선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단다. 그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만 빼고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지.

정작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도, 모든 게 정지해버린 느낌이었어.


때때로 지나온 순간들을 좀 더 소중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날에 대해 후회라기보다 그 무심히 내버려뒀던 시간들이..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십 대의 언젠가 너는 어느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지 아마.

땅을 바라보며 걷는 조심스러움도 좋지만,

눈앞의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이 있고

가끔은 하늘을 바라보아야 꿈이란 것을 꿀 수 있는 것이지.

시선을 어느 한 곳에 두지 말아야겠다고 삶을 다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힘이 들 때엔 그 어느 날의 너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것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서있어. 그 앞에서 정지해있다면, 어떤 선택이 두렵다면....

사실은 무엇을 택해도 괜찮다는 그 말이 하고 싶구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네 곁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만을, 힘든 순간의 모든 장면이 선명하진 않을 거라는,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겠니.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고, 너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한차례 무너진 삶도 삶이었고, 그것 그대로 흐르는 게 삶인 것이지.

애써 겨울을 밀어내지 않아도 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그저 흘러들어 녹아들면 그만이구나.

녹아들어 함께 흐르기 위해 애를 쓰니 또 어떻게든 견디어내니 봄의 볕이 스미고, 어느 따스한 날엔 꽃을 피우기도 했단다. 살아가는 동안의 나의 선택은 늘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틀렸다 단정 지을 수 있는 일들이 있을까마는 옳은 것은 언젠가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니까.




살며, 그 사실만을 믿어주겠니.



길.jpg



여든의 생이 다시 한번 가을을 지나고 있구나.

나는 남들과 같이 곱게 물이 들고 싶다.

한 계절을 또 잘 견디어냈어.

너 또한, 오늘을 잘 견디어냈으면 좋겠구나.










@ HSP's Creative Writing3

- 80살이 되어 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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