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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은 잔인의 어머니

「에세」 84

by 루너

나는 어렸을 적 무서운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잔인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많이 읽었다. 역사적으로 잔인한 인물들이 정말 많았다. 이반 뇌제, 바토리 남작 등...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살인자'가 아니라 '학살자'라는 것이다. 물론 죽이는 일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권력을 통해 정당성까지 확보했으니 잔인한 일을 대량으로 저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권력자가 아니더라도 잔인한 방법을 쓰는 살인마들은 한두 명으로 사건을 끝내지 않았다. 단순히 성정을 자제하지 못한 것일까?


몽테뉴는 폭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흥미로운 고찰을 남긴다. "무엇이 폭군들로 하여금 그토록 살생을 좋아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기 안전에 대한 염려이다. 그들의 비겁한 마음은 저를 공격할 수 있는 자들을 죄다 몰살해 버리는 것 이외에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킬 다른 방법을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들까지 할퀼까 봐 두려워서, '모두 다 무서워서, 모두 다 후려친다.'(클로디아누스)" 이 말인즉슨 잔인함은 용기가 없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가 흔들리는 것이 두려워서, 안위를 흔들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과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다고 심성이 변하지 않으니, 잔인함은 연쇄적으로 발현한다. "최초의 잔인성은 잔인성 자체로 인해 실행된다. 거기서 정당한 보복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그 공포가 이어지는 일련의 새로운 잔혹 행위를 유발한다. 하나의 잔혹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잔혹 행위를 행하면서 말이다."


언젠가 고대와 중세의 고문 기구들을 본 적이 있다. 악명 높은 아이언 메이든, 팔라리스의 황소 같은 것들은 목적을 떠나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하다 싶었다. 이런 도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몽테뉴는 이렇게 설명한다. "폭군들은 두 가지, 즉 죽이는 것과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게 하는 것을 한꺼번에 하기 위해 죽음을 오래 끄는 방법을 찾으려고 온갖 재주를 부린다. 그들은 자기 적이 죽기를 바라지만 분풀이를 음미할 여유도 갖지 못할 만큼 빨리 죽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 그들은 골머리를 썩인다. 고문이 격렬하면 빨리 끝나고, 길게 간다면 자기네가 흡족할 만큼 고통스럽지 못하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갖가지 고문 기계들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잔인한 사람들은 심판만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심판을 통해 자신을 높이는 것이 어쩌면 심판 자체보다도 더 큰 목적이다. 그래서 그런 잔인한 고문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몽테뉴는 이 글의 제목을 '비겁함은 잔인의 어머니'라고 지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겁함이란 용감함의 반대말이다. 용감한 사람은 계획에 방해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몸이 아닌 마음으로 굴복시키려 한다. 그러나 용기가 부족해서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은, 일단 방해자를 제거하기 위해 요란하게 행동한다. 실패를 너무도 두려워한 결과가 잔인성인 것이다. "그를 처치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대의 안위를 위한 일이다."


당연히 이는 무익한 감정이다. 일을 키워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 행동이다. 진심으로 훌륭한 사람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볼 줄 안다. 그러므로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행동은 잔인함을 기르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목적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은 수단이 좋지만 목적이 좋지 않은 추태다.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증대하는 활동, 공공의 안녕과 공동의 영광으로 연결되는 훈련이 훨씬 위엄 있고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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