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85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를 맹비난한다. 그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철학을 공부하며 탁상공론한다는 이유였다. 「고르기아스」는 결국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에서 참패하며 끝났지만, 사실 칼리클레스가 괜히 하는 말은 아니다.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이로운 일을 실현해야 할 때에 무한히 배우고만 있으며, 심지어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니, 칼리클레스 입장에서 답답하게 보일만했다.
몽테뉴는 말한다. "모든 일에는 제각기 때가 있다. 좋은 일도 그렇고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유베날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현자는 덕행에도 한계를 둔다." 좋은 일은 평생에 걸쳐 해야 옳다. 하지만 나이에 따라 조건이 달라지는 만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필로포이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무기 훈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이 그 나이에 무기 훈련을 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실제로 무기를 사용해야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은 아니다. "가장 큰 악덕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사는 것을 새로 시작한다. 우리는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았는데, 우리의 욕망과 계획은 늘 태어나기만 한다." 사람은 신선한 일을 늘 추구한다. 그러다 보면 나이에 안 맞게 새로움을 추구하러 다니다가 발휘해야 할 미덕을 썩히는 것도 자연스럽다. 더구나 칼리클레스가 비판한 소크라테스를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는 탐구가 평생의 업이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론을 쉽사리 정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다. 물론 모든 삶마다 일반적인 단계를 구분할 수 있겠지만, 사람마다 평생의 업은 다르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배움에 매달리는 모든 노년들이 어리석은 것은 아닐 테다.
몽테뉴는 이렇게 권한다. "공부를 해야 한다면 우리 조건에 알맞은 공부를 하자." 나는 첨언한다.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에 충실하자고. 늙어서라도 새로운 것을 꽃피울 사명감을 느낀다면 여전히 공부해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