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90
토스카나의 청년 스푸리나는 굉장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여자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불 지른 열병과 열정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서, 몸에 상처를 잔뜩 내고 다녔다고 한다. 몽테뉴는 이를 두고 '훌륭하다기보다 놀랍다.'라고 평한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몸을 씻었다지만, 몽테뉴가 보기에 스푸리나의 행동은 멸시와 증오, 보기 드문 장한 행위에 대한 질투를 일으켜서 죄를 더한 꼴이었다. "하느님이 주신 그 선물을 모범적인 덕과 절도 있는 품행의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옳았고, 나아가 더 영광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탈선을 스스로 막기 위해 제약을 일부러 둔다. 몸을 관리하기 위해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거나, 낭비벽을 없애기 위해 한 달의 예산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그 예시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를 조절하려는 행동은 분명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다르다. 결코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주제에 고생만 잔뜩 늘리면 무의미한 고문이 될 것이다.
몽테뉴는 특히 몸에 속한 정념과 영혼에 속한 정념을 구분한다. "야망, 탐욕 등처럼 온통 영혼에 속해 있는 정념들은 이성을 훨씬 더 애를 먹인다. 이 경우에 이성은 기댈 것이 이성 자체의 수단밖에 없고, 이 욕망들은 포만을 모를 뿐 아니라 즐길수록 더 격해지고 커지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평소에 칭찬하던 카이사르도 이 비판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호색한이었지만 야심에게 잠식당하자 다른 정념을 제쳐두고 야심에만 충실하게 된다. 가장 강한 정념이 다른 정념을 묻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야심에 잡아먹힌 나머지 카이사르가 원래 갖고 있던 덕성도 발현하지 못하게 됐으니, 몽테뉴는 이것을 심히 안타까워한다.
이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이다. "절제는 고통을 겪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덕목이다." 절제는 고귀한 일이지만 사람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정말 힘든 일이기도 하다. 고대인들도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욕망을 무작정 억누르기보다 최소한으로 표출하는 연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