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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에 관하여

「에세」 99

by 루너

오늘은 감상을 늘어놓기 전에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나는 솔직히 이번 글을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분량은 정말 긴데 내가 평소에 관심 있던 주제를 다루지 않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없었다. 또 베르길리우스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그의 문체의 특징을 구분할 방법도 없었다. 시를 잘 읽지 않아 시에 조예가 없는 탓도 있다. 그래서 이번 글을 꼼꼼히 읽지 못했다. 단지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 몽테뉴에 놀랐을 뿐이다. 그래도 긴 분량 속에 보배 같은 문장들이 있었으니, 베르길리우스의 시나 몽테뉴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 문장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쾌락을 추구하는 일은 보통 금기시된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말하는 일조차 지탄의 대상이다. 몽테뉴는 베르길리우스가 그런 활동들을 완곡하게, 그러나 섬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그의 문장을 칭찬한다. 그런데 나는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보다 쾌락의 금기에 대해 눈길이 더 갔다. 요즘 시대는 몽테뉴의 시대보다도 훨씬 개방적이지만 여전히 금기가 남아 있다. 물론 쾌락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가장 고결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어떤 면에서 쾌락의 부정은 쾌락의 고백보다도 질 나쁜 일이다. 위선이기 때문이다. "내 행위나 생활 방식 중 최악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태도의 추하고 비겁함만큼 추하지는 않으리라."


풍속은 대체로 내숭이다. "가장 덜 사용되고 글로 덜 쓰이며 더 잘 건너뛰는 단어들이야말로 가장 속속들이 알려지고 가장 널리 알려진 어휘이다." 학교는 성에 대해 입도 뻥끗 안 하며, 하게 된다면 조심하라는 이야기만 반복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모두가 다 안다.


금기를 뒤엎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우리의 솔직한 충동이 존재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가 금기들에 완전히 적응해서 금기가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쓰는 언어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단어들을 생산하고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이다. 이 단어들은 더 이상 바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살과 뼈로 된 것이다. 언어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훌륭한 정신이 그것을 다루고 사용함으로써이다." 언어의 본질은 의미에 있으며, 언어에 의미를 주는 것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욕망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욕망이 스스로를 해치게 놔두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짐승처럼 먹고 마신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의 작용을 가로막는 행위들은 아니며, 정신의 작용을 통해 우리는 짐승에 대한 우리의 우위를 유지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말할 뿐인데, 표현의 고상함을 문제 삼을 수는 있겠지만 표현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문체는 해방하지 않고 기품을 남겨두되, 문체가 표현하는 내용은 제약을 풀어야 한다. 만일 전능한 존재가 기품을 유지하려 문장으로 발버둥 치는 문장가를 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보편적이고 의심의 여지없는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파적이고 허구적인 너의 법을 두고 우쭐댄다. 그 법이 특수하고 모호하며 더 모순될수록 너는 더욱 거기에 네 노력을 바친다. 네가 고안한 것이 분명한 자의적 규칙들이 너를 사로잡고 붙들어 매니, 네 사는 구역만의 규칙들 또한 그렇다. 하느님의 규칙, 이 세계의 규칙에 대해는 눈도 깜짝 않는다." 전능한 존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몽테뉴는 따끔하게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 쾌락 앞에서는 영혼을 냉담하게 만들고, 쾌락으로 나아갈 때는 마치 무슨 강요당한 비열한 의무와 필요에 의해 끌려가는 듯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 아닌가?"


고로 우리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지만, 말하고 싶은 것을 억누를 이유는 없다. 욕망은 우리의 것이다. 뒤에 숨어 욕망을 해방한다는 말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진정 해방됐다 말하려면 뒤에 숨는 일조차 없어야 한다. 또 삶 속에서 욕망을 해방해놓고 문체에서는 욕망을 해방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얼마나 역설적인가. 결국 완벽히 훌륭해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그나마 최고의 선(善)은 솔직함이다.


역사 속에서 애꿎은 희생들이 정말 많이 벌어졌다. 방종함을 이유로 여자들은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시대가 있었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를 탄압한 일은 한국사에 오점을 남겼다. 나는 이번 글을 읽고 책을 덮으며, 뚜렷한 성 관념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솔직함이 미덕인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남았다. 부끄럽지만, 따지고 보면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마음을 괴롭히는 일들이 아직까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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