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2장
"인간의 조건 : 변덕, 권태, 불안." 「팡세」의 24번째 단장이다. 파스칼이 보기에 인간은 미약한 존재였다. 일정한 규준을 가지고 생각할 수 없으며, 지식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지식이 정확하지 못해 불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인간의 행로는 필연적으로 허무하다. 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도 부를 확고히 소유할 힘이 없고, 학문으로 무언가를 성취해도 병에 들면 없어진다. 파스칼 본인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진리나 선에 대해 무능력하다."
인간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고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에세」 같은 수많은 지성인들의 글에서 이미 지적돼온 문제이다. 선현들은 이런 허무를 타개할 방책으로 늘 이성을 갈구해왔다. 그러나 파스칼은 의무를 품는다. 우리가 정녕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이성으로만 행동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인간의 판단에 상상력이 이성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상상력은 이성으로 하여금 믿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부정하게 한다. 상상력은 감각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감각으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상상의 동의 없이는 이 지상의 모든 부유함은 부족하다. 이성이 상상력을 완전히 극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보통은 그 반대이다." 예를 들어 왕의 행렬을 생각해 보자. 민중이 존경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왕 한 사람 때문이 아니다. 왕이 데리고 다니는 친위병들과 수행원들의 커다란 행렬이 왕과 동일시된다. 즉 민중의 상상력이 왕의 힘을 기만적으로 키운다. "왕의 권력은 백성의 이성과 어리석음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어리석음에 더 큰 기반을 둔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것의 기반이 나약함이다." 마찬가지로 의사의 가운, 법조인들의 법복에서 우리는 위엄을 상상하고, 그것으로 힘을 오판한다. "세상 사람은 공인된 겉모양에 저항할 수 없다."
우리가 정녕 이성과 감각 중에 어느 한 쪽을 고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까? "진리의 원칙인 이성과 감각은 그 각각이 진지함이 결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호적으로 서로를 속인다." 결국 이 상호배타적인 두 판단력 때문에 인간은 진리에 대해 무능력하다. 더구나 굳이 힘이 더 센 쪽을 꼽으면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이 더 강하다. 예를 들어 몽테뉴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판단은 현재보다 미래로 쓸려간다. "우리는 신중하지 못해서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 헤매고, 우리에게 속한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헛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여,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놓치고 있다. 보통 현재라는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우리를 힘들게 하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게 그것을 감춘다. 그리고 현실이 즐거우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애석해한다. 우리는 이 현실을 미래로 지탱하려 하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어떤 확신도 없는 시간을 위해 우리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많은 것을 준비하려는 생각을 한다." 즉 인간은 당장 괴롭게 느껴지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시점을 저 멀리로 보내며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렇게 이성도 기만의 안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과연 이성이라는 것을 오롯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이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으며, 나 자신도 그럴 때가 많다. 파스칼은 이번 장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순수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셈인데, 나는 여기에 당장 반박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그래도 이성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무슨 소용인가?
다만 몽테뉴가 설파한 퓌론주의, 즉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인간의 판단마저 그렇다고 믿는 회의주의가 약간의 처방은 될 수 있다고 본다. 스스로의 판단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적어도 사물에 기만을 씌우지 않고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생각할 테니 말이다. 상상력이 얼마나 개입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상력을 최대한 걷어내고 현실을 보는 눈을 키운다면 조금은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