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루아얄에서]

「팡세」 11장

by 루너

이번 장은 파스칼이 '포르루아얄'이라는 곳에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파스칼은 1658년 포르루아얄에서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행한 바가 있다고 전해진다.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쓴 글이다 보니 파스칼 자신의 생각보다는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을 논하는 데 치중한 감이 있다. 하지만 이 독특한 목적 때문에 이 장은 오히려 인간의 이해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파스칼은 사람들이 최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무작정 배척하는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기독교로 눈을 돌릴 미끼를 주는 일이 우선이었다. 즉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앎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의지를 주려 한 것이다.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그 반대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암흑이 있다."


물론 신은 이해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신을 체험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스칼은 수학자답게 무한을 언급하며 신의 부재를 증명할 방법도 없다고 주장한다. "불가해한 것이라고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한 수, 유한한 무한의 공간." 파스칼은 신앙이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수용의 영역임을 안다면 사람들은 신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아가 신앙이 개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짐을 지운다는 선입견도 지우려 했다. 모든 신자가 수도승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성 저 너머의 신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나머지 일은 알아서 보장되리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파스칼의 목표였다. "나는 묻고 싶다. 하느님의 요구 중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본래 사랑과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왜 하느님이 그에게 알아볼 수 있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나타날 수 없다고 믿는지를 말이다."


이렇게 보면 파스칼은 믿음의 근거를 논리에서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의지에서 찾는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있는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앎의 시작은 논리보다 관심이다. 우리는 기초적인 사실로부터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관심을 통해 어려운 것을 먼저 안 다음 그 기본 원리를 배운다. 화학 실험에서 색이 바뀌는 지시약을 신기하게 본 뒤 산과 염기를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득 우리 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고자 하는 만큼 보인다." 알고자 하는 마음, 즉 관심을 스스로에게 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기본부터 쌓아 올려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 것도 학문의 묘미이지만, 불가해한 것에 관심을 느끼고 기초로 내려가는 것도 즐거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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