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12장
이번 장의 제목은 '서두'이다.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의 서두를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파스칼이 쓰려던 기독교 호교론의 서두일 수도 있고, 혹은 그 2부의 서두일 수도 있다. 11장이라는 애매한 위치 상 2부의 서두로 의도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11장에서는 무신론자들과 신자들을 구분하며 각자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를 모색하려 한 흔적이 보인다. 완성된 장이 아니어서 그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파스칼은 사람들을 각각 구분하면서도 결국 모두가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말로 향함을 언급한다. "연극은 전체적으로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지막 장은 피눈물이 난다. 마지막에 사람들이 머리 위에 흙을 뿌리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즉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모두가 맞이할 결말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로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낭떠러지를 보지 않기 위해 무언가로 앞을 가린 다음에 낭떠러지로 근심 없이 달려간다." 이 문장에서 그 무언가는 믿음 아니면 이성이다. 파스칼은 물론 믿음을 선호한다. 믿는 자는 천국에 갈 테니 믿음은 일종의 보험이 될 것이며, 불신자들은 아무런 보험 없이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팡세」 내내 비판의 대상인 이성의 불완전함을 생각했을 때, 인간이 스스로에게 기대거나 똑같은 인간에게 기대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사회, 우리처럼 비참하고 우리처럼 무력한 사람들의 사회에 의지하는 우리는 참으로 별나다." 결국 파스칼에게 믿음은 단순히 이성을 넘는 영역이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실리적인 영역인 셈이다.
나는 사실이 그러하다고 해서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권유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결정 또한 그들이 숙고한 결과로 맺어진 것이다. 그들의 의지가 어떤 귀결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신자들의 믿음도 어떤 귀결로 이끌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의 발걸음을 용기 있게 믿는 불신자들에게 끌린다. 다만 믿음이 나약하다는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 결국 각자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신이 있다면 신자들 외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소박한 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혜택을 주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다만 이치대로 집행하는 그런 신이 있으면 좋겠다.